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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상욱 시인 / 움막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9.
송상욱 시인 / 움막

송상욱 시인 / 움막

 

산골 움막에 홀로, 가난을 배앓이 앓듯

살아온 할머니가 있다

오늘도 움막에는 누더기 같은 해거름이 인다

할머니는 산아래 들샘으로 내려가

마을 아낙이 겉보리 때껴 씻은 보리뜨물 한 바가지 얻어와

쪼글탱이 양푼에 부어 끓인다

아궁이에 금불 지핀 불 위에 얹고

말린 쑥부쟁이 한 줌 풀어넣어 끓인다

정재 바닥엔 불사조 같은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찌들어빠진 가난의 똥처럼, 검다

 

찬바람이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다

정재문 밖, 언덕받이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에서

쌀 씻는 소리가 난다

쌀 씻는 소리는 한밤 봉창을 스치는 달빛에도 난다

 

할머니가 사는 움막은 옛 짐승들의 고향같다

 

 


 

 

송상욱 시인 / 가을날

 

 

중력이 해체되는 가을이다

머리 끝에서 숨소리가 헛돈다

하늘엔 빈 액자만 걸려 있다

비밀스런 뱀의 색깔보다 차가운

초상화 같은 뒷 그림자들이 허공을 채우는

가을날은

마네킹의 꿈 속에 흰 새가 산다는

그 집

지붕 위에서 허공의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헛소리인 듯 지는 낙엽의 색깔이

잊혀진 여인의 색깔 같아

버려진 시간을 줍는 일 보다는

남루한 그늘이 서럽게

떠나온 날들을 다시 비우는

저, 나무아래 죽음을 읽는 소리 바쁘다

 

 


 

 

송상욱 시인 / 그리움

 

 

멀다 하늘을 나는

새의 발자취를 누가 찾을 것인가

지워진 하늘 너머

신화를 보는 눈으로 서 있는 나무는

허공에 편지를 쓴다

꿈속 젖은 긴 밤이

나뭇가지 끝에 이슬로 맺혀

새의 동공에 빛핀 허공의 눈이 된다

 

 


 

 

송상욱 시인 / 불공

 

 

법당에

눈 먼 하늘 가라앉는

부처님의 옷을 사뤄놓고

발그레한 연꽃 두세 종이

넋을 무는

허공 가득한

화상(畵像)을 지운다

 

-격월간 <한겨레문학> 1993년 11. 12월호, 창간호

 

 


 

 

송상욱 시인 / 황진이

 

 

칠성당 꽃 각시 혼 풀려나간

무지개 끝자락에서 뱀 울음소리가 난다

뱀 울음소리는, 끝에서 독을 풀어낸

전생의 사랑이 끝난 빈 몸에서, 난다

영혼의 색깔이

하늘에 물들어 무지개가 된

비쌘 마음 감추며 몌별한

꽃상여 쪽지문 삐끔이 내다보며,

아 임 그리워 자량(資糧) 소맷깃 천자락

펼친, 여인아

저 만장(輓章)이 대 걸린 무지개 속살 비쳐

서럽게 서럽게 떠가는 꽃 향, 그리운 여인아

 

 


 

 

송상욱 시인 / 장미

 

 

허공의 반점으로 피었나

바람의 피묻은 환등을 켜고

속죄 앓는 꽃으로 피어나

어머니 가신 길 핏자죽에 물들어

사악한 어둠의 꿈결을 뒤척이다

낮선땅 어느 족장의 시녀가 되어

천년의 눈물이 마른 울음 견디다 못해

앙상한 뼈살에 가시를 꽃고

한 낮에도 홀로 붉은 울음 운다

쳐다보고 또 보아도

허공에 남은 것은 슬픈 바람 소리 뿐

차라리 하얀 천사의 옷깃에

한 송이 죽음으로 꽂히거라

 

 


 

 

송상욱 시인 / 지리산 선인

 

흰 두루마기에 청약립 쓴 은자를 만나

허공 반 쯤 비운 술잔을 채운다

상투 쪽 씌운 갓 내려놓고 초의 벗어 횃대에 걸어놓고

취묵 필 거두어 창호지에 하늘그림을 그린다

붓 끝이 산 첩첩 흘러내려온 물가에

신이포 두 세 송이 폭포수에 머리 감아

아련한 물빛 꽃향 잔에 스민다

정적이 새나간 새벽

언제여, 우리가 볏술 마시던 때가

십오야 요요에 마지막 잔 채운 잔과 잔 사이

먼 길 떠날 방외사 소맷길 움켜잡고

매별한 섭섭 비쌘 마음

아~ 가지 말라는 말

어찌 거자막추 라 하지 않으련가

하오나 허한 세상

또 온다는 말, 그 말

먼 날 귓겸에 전해오는 내두사 를 어찌 알가

​​청약립靑篛笠 = 푸른 갈대로 만든 갓

초의草衣 = 세속을 떠나 은둔한 사람이 입는 옷

취묵醉墨 = 술에 취해 쓰는 붓글씨

볏술 = 가을에 벼로 갚기로 하고 마시는 외상술

요요寥寥 = 몹씨 쓸쓸함

방외사方外士 = 세속 속된 일에서 벗어나 고결하게 사는 사람

몌별袂別 = 소맷깃 잡고 작별

비쌘 = 같이 지내고 싶은 간절함, 허나 그러지 못하는

거자막추去者莫追 = 가는사람 억지로 막지말라

내두사來頭事 = 앞으로의 일

 

 


 

송상욱(宋相煜) 시인 (1939-2024)

1939년 전남 고흥 출생. (본명: 宋相恩). 동아대학교 국문과 졸업. 1975년 시집 『망각의 바람』으로 시작활동. 시집 『망각의 바람』 『영혼속의 새』 『승천하는 죄』 『하늘뒤의 사람들』 『무무놀량』 『광대』 등. 1964년 제1회 동아문학상 수상(동아대 주최), 1969년 교단 생활을 시작.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인 시지 『詩』발행. 2024.7.26 별세 향년 9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