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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욱 시인 / 움막
산골 움막에 홀로, 가난을 배앓이 앓듯 살아온 할머니가 있다 오늘도 움막에는 누더기 같은 해거름이 인다 할머니는 산아래 들샘으로 내려가 마을 아낙이 겉보리 때껴 씻은 보리뜨물 한 바가지 얻어와 쪼글탱이 양푼에 부어 끓인다 아궁이에 금불 지핀 불 위에 얹고 말린 쑥부쟁이 한 줌 풀어넣어 끓인다 정재 바닥엔 불사조 같은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찌들어빠진 가난의 똥처럼, 검다
찬바람이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다 정재문 밖, 언덕받이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에서 쌀 씻는 소리가 난다 쌀 씻는 소리는 한밤 봉창을 스치는 달빛에도 난다
할머니가 사는 움막은 옛 짐승들의 고향같다
송상욱 시인 / 가을날
중력이 해체되는 가을이다 머리 끝에서 숨소리가 헛돈다 하늘엔 빈 액자만 걸려 있다 비밀스런 뱀의 색깔보다 차가운 초상화 같은 뒷 그림자들이 허공을 채우는 가을날은 마네킹의 꿈 속에 흰 새가 산다는 그 집 지붕 위에서 허공의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헛소리인 듯 지는 낙엽의 색깔이 잊혀진 여인의 색깔 같아 버려진 시간을 줍는 일 보다는 남루한 그늘이 서럽게 떠나온 날들을 다시 비우는 저, 나무아래 죽음을 읽는 소리 바쁘다
송상욱 시인 / 그리움
멀다 하늘을 나는 새의 발자취를 누가 찾을 것인가 지워진 하늘 너머 신화를 보는 눈으로 서 있는 나무는 허공에 편지를 쓴다 꿈속 젖은 긴 밤이 나뭇가지 끝에 이슬로 맺혀 새의 동공에 빛핀 허공의 눈이 된다
송상욱 시인 / 불공
법당에 눈 먼 하늘 가라앉는 부처님의 옷을 사뤄놓고 발그레한 연꽃 두세 종이 넋을 무는 허공 가득한 화상(畵像)을 지운다
-격월간 <한겨레문학> 1993년 11. 12월호, 창간호
송상욱 시인 / 황진이
칠성당 꽃 각시 혼 풀려나간 무지개 끝자락에서 뱀 울음소리가 난다 뱀 울음소리는, 끝에서 독을 풀어낸 전생의 사랑이 끝난 빈 몸에서, 난다 영혼의 색깔이 하늘에 물들어 무지개가 된 비쌘 마음 감추며 몌별한 꽃상여 쪽지문 삐끔이 내다보며, 아 임 그리워 자량(資糧) 소맷깃 천자락 펼친, 여인아 저 만장(輓章)이 대 걸린 무지개 속살 비쳐 서럽게 서럽게 떠가는 꽃 향, 그리운 여인아
송상욱 시인 / 장미
허공의 반점으로 피었나 바람의 피묻은 환등을 켜고 속죄 앓는 꽃으로 피어나 어머니 가신 길 핏자죽에 물들어 사악한 어둠의 꿈결을 뒤척이다 낮선땅 어느 족장의 시녀가 되어 천년의 눈물이 마른 울음 견디다 못해 앙상한 뼈살에 가시를 꽃고 한 낮에도 홀로 붉은 울음 운다 쳐다보고 또 보아도 허공에 남은 것은 슬픈 바람 소리 뿐 차라리 하얀 천사의 옷깃에 한 송이 죽음으로 꽂히거라
송상욱 시인 / 지리산 선인
흰 두루마기에 청약립 쓴 은자를 만나 허공 반 쯤 비운 술잔을 채운다 상투 쪽 씌운 갓 내려놓고 초의 벗어 횃대에 걸어놓고 취묵 필 거두어 창호지에 하늘그림을 그린다 붓 끝이 산 첩첩 흘러내려온 물가에 신이포 두 세 송이 폭포수에 머리 감아 아련한 물빛 꽃향 잔에 스민다 정적이 새나간 새벽 언제여, 우리가 볏술 마시던 때가 십오야 요요에 마지막 잔 채운 잔과 잔 사이 먼 길 떠날 방외사 소맷길 움켜잡고 매별한 섭섭 비쌘 마음 아~ 가지 말라는 말 어찌 거자막추 라 하지 않으련가 하오나 허한 세상 또 온다는 말, 그 말 먼 날 귓겸에 전해오는 내두사 를 어찌 알가 청약립靑篛笠 = 푸른 갈대로 만든 갓 초의草衣 = 세속을 떠나 은둔한 사람이 입는 옷 취묵醉墨 = 술에 취해 쓰는 붓글씨 볏술 = 가을에 벼로 갚기로 하고 마시는 외상술 요요寥寥 = 몹씨 쓸쓸함 방외사方外士 = 세속 속된 일에서 벗어나 고결하게 사는 사람 몌별袂別 = 소맷깃 잡고 작별 비쌘 = 같이 지내고 싶은 간절함, 허나 그러지 못하는 거자막추去者莫追 = 가는사람 억지로 막지말라 내두사來頭事 = 앞으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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