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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수진 시인 / 경계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9.
유수진 시인 / 경계에 대하여

유수진 시인 / 경계에 대하여

 

 

 밑줄 한 번 긋지 않고 읽었던 책에 지도가 떠오른다

 

 가시담장의 붉은 손끝을 기억하는 심장이 꽃잎을 털어낸 장미나무의 시간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을 거야 고대도시의 운하를 보여주며 나를 들뜨게 하던 옛 지도를 닮은 오늘 오로지 좌표의 순서 쌍을 잃고 싶지 않았다 반환점에서 받아든 번호표에 영화의 첫 장면처럼 나타나던 푸른 나침반 자명종이 울리는 보름달을 던지자 고도*의 바다에 퍼지는 노란 물수제비

 

 오후가 흐르는 동쪽으로 손전등 길을 비춘다

 

*사뮈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Godot)

 

 


 

 

유수진 시인 / 꽃밭

 

 

마당엔 소나기 같은 짠내

 

동네 어귀 그 집,살짝만 밀었는데 삐걱이며 열리는 대문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 빈틈없이 뭔가를 심어놓은 마당

대문과 가까운 쪽 기둥에

햇볕에 바랜 신문지 같이 붙어 있는 글씨

담배

 

계셔요,

계셔요,

계셔요,

 

마루에 걸터앉은 어둠보다 더 컴컴한 걸음

구부러진 등을 업고 방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가던

담뱃집 할머니

 

하늘 군데군데 피어있던 꽃구름

하나 둘 떼다가 곰방대에 쑤셔넣고 불을 붙인다

깊게 몇 번을 들이마셔 빨아야 빠작빠작 타오르던 불꽃

 

구겨지고 펴기를 반복하느라

상추 한 포기 심을 자리도 남이 있지 않은 만큼 꽉꽉 들어찬 검버섯

누구도 들어서지 않던 그 꽃밭

 

 


 

 

유수진 시인 / 우편함

 

 

 잘라놓은 기억을 붙잡고 바늘에 마음 한 줄 꿰어 촘촘하게 홈질을 시작한다

 

 바늘을 넣었다가 뺄 때마다 조금씩 붙어가는 조각들

 이어진 시간을 포개고 마음을 두 줄로 꿰었다

 아래쪽으로 땀을 뜨며 공그르기한다

 시간이 맞물리며 모양을 잡아가면 바늘땀이 감쪽같이 사라진 공간

 뒤집은 시간을 맞잡고 깊은 땀을 떠가며 반박음질한다

 여닫을 수 있는 지퍼까지 달아놓은 시간에 튼튼한 가죽실로 파란 손잡이를 붙였다

 파란 끈을 어깨에 둘러멘 오후

 마음이 달랑거리며 따라온다

 

 우리 동 입구 우편함을 지나치는데 삐죽이 꼬리 내미는 관리비 명세서

 편지 하나 따라 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언제 적에 살던 이름일까 나의 영역에 찾아온 불청객

 반송함에 넣고 돌아선다

 

 미처 데려오지 못한 나의 조각도

 어느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끌어당겨지지도 않는 때와 곳,그 순서쌍

 

 


 

 

유수진 시인 / 은행나무

 

 

세밀화를 들추다 암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문득 지금 내가 아는 것들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운동화 끈 매는 걸 처음 가르칠 때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진땀 흘리는 아이에게

몇 번을 일러줬는데 아직도 그걸 못하냐며 면박 주던

그날 그 가을도

은행잎이 지천이었을 텐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리본이 마음에 들 때까지

운동화 끈을 고쳐 멜 수 있게 오래 기다려주던 아버지

 

현관을 노랗게 밝히던 그날의 백열등

 

 


 

 

유수진 시인 / 오후의 기울기

 

 

 방금 삶아 빨아 넌 흰 시간이 여자의 동그란 눈 속에서 그네를 탄다 노란 꽃잎이 날아와 앉으면 오후가 기울어지며 모래알처럼 쏟아질 것 같은 봄날

 

 다만,

 수평이 맞지 않을 뿐입니다

 

 그 여자 비로소

 깍지 낀 손을 풀고 주먹을 꼭 쥐며 숨을 내쉰다

 

 핸드폰에 무인우주선처럼 뜬 새 스케줄

 

 지금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물이 새고 있어요 빨리 와 주세요

 

 분수처럼 솟구치는 갈증을 삼키며

 방금 수신된 목적지로 가는 길을 검색한다

 

 하필 봄눈이 쏟아지고

 마음은 음력생일처럼 자꾸 자리를 비우는데

 

 때는 거기,

 곳은 내일,

 

 


 

 

유수진 시인 / 화분

 

 

 정육점 뒷문에 화분 하나 쓰러져 있다 혼자서는 옮길 수도 없을 듯 커다란 화분 미처 추스르지 못한 붉은 속엣 것까지 바닥에 울컥 쏟아놓고,

 

 마침 말쑥한 차림으로 문 열러 나온 정육점 주인 지난 밤 강풍에 유리창이 깨질까봐만 걱정했다며 맨손으로 주섬주섬 흙과 돌들을 주워 담는다 볼일 보고 돌아오다 들른 정육점 찬송가를 펴놓고 기타 치던 주인이 붉은 조명등 아래서 고기보다 더 붉은 손으로 고기를 손질한다 마른 피가 얼룩덜룩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검은 봉지에 담아 넘겨받은 고기 한 근

 

 네가 대신 쓰러졌구나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액땜한 거야 엄마가 생각나고 물컹하게 만져지는 차가운 그리움 오늘 불현 듯 엄마를 받아든다

 

 


 

 

유수진 시인 / 사이와 사이에 길은 있고

 

 

털 바지의 길이가 늘어날수록 그림자도 길어졌다

관절염을 앓던 엄마는

거실 등나무 소파에 앉아 겨우내 털 바지를 떴다

등나무의 계절에 코를 만든 엄마가

창문에 비치는 햇살을 끌어와 땀을 떠 갈 때

꼬리를 말아 올린 햇살이

엄마 등 뒤를 돌아 슬그머니 물러나곤 했다

눈이 오지 않고 한파가 자주 찾아왔다

마른 겨울이라고 했다

곰팡이가 슨 현관 중문이 앓는 소리도 깊어졌다

귀퉁이가 갈라진 문짝에 틈이 벌어졌다

열세 살의 마음에도 틈이 생겼다

오후의 페이지를 침을 묻혀가며 넘기다 보면

털 바지를 입고 마냥 신났던 아침을 만난다

틈을 떠서 온기를 만들던 기적의 거실을 만난다

사이를 떠서 사이를 메꾸고

틈을 놓아 틈을 채우는 계산법은

그림자로도 옷을 지을 줄 안다

 

아 저기, 둥근 해 이제야 보인다

그림자의 뒷면을 돌돌 감고 나오는 저 환한 털실 한 뭉치

 

 


 

유수진 시인

1971년 대전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대학원졸업(언어학석사).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5년 월간 《시문학》 등단. 제10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