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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숙이 시인 / 황태덕장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9.
박숙이 시인 / 황태덕장에서

박숙이 시인 / 황태덕장에서

 

 

습관처럼, 명태의 알몸을 덕장의 여자가 만지작거린다

온몸의 근육을 쭉 뻗는 명태,

한 몸을 수백 번, 허기진 남정네처럼 고루고루 만져줘야만 한단다

그러고 나면 그 뻣뻣하던 것이 때깔부터 확 틀린단다

손맛을 느낀 후에야 황태의 구실을 제대로 한단다

죄책감이 든다

내 손을 아낀 죄, 손에 큰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나의 손맛을 충분히 상대가 느껴보도록 해주지 못한 죄

시 쓴답시고 생파리같이 요리조리 피하기만 한 죄

애정이 목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얼었다 녹았다 성깔을 드러내는 우리 집 명태,

아 저 담백하고 뻣뻣한 명태를 황태로 거듭나게 하는 길은 오직

짭조름한 조개껍질 같은 작은 손 하나였구나!

 

 


 

 

박숙이 시인 / 거두다

 

적막이 살을 슬슬 파고드는데

마당 귀퉁이 늙은 춘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올곧은 열매를 거두려면

한파 속의, 쌔빠지게 키운 피 같은 꽃을

과감히 버려야 하나니’

 

딸자식 시집보낸 뒤

그간, 그냥 그렇게 무심히 지나쳤던 홍매화의 그렁한 낙화가

갑자기, 장경동 목사님 설파처럼 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다

 

 


 

 

박숙이 시인 / 단풍이 곱게 물들었네요

 

 

고운사 숲길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네요

이 순간을 전하려

1분 안에 그대 기슭까지

수십 번 갔다가 되돌아옵니다

 

벅차오르는 단풍이

첫 마음처럼

순식간에 갈 데까지 가버릴 것만 같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사무치는 이 가을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박숙이 시인 / 라이벌

 

 

들여다보면 저 들판

꽃만 있는 게 아니네

 

꽃 사이사이에 잡초가

관계처럼 끼어 있네

 

뽑을까 벨까 망설이니, 아서라

선배가 한사코 말린다

 

생각해 보렴

풋풋한 저 라이벌 때문에

긴장하며 네가 널 피워내질 않았는지,

미워하지 말거라

 

세상에 꽃만 있다면야

어디 네가 꽃이더냐!

 

 


 

 

박숙이 시인 / 하마터면 익을 뻔했네

 

 

맨 처음 나를 깨트려 준 생솔 같은 총각 선생님,

촌 골짜기에서 올라와 혼자 제자리 찾아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불안 불안한,갑갑한 이 달걀에게

여러 정신이 번쩍 들도록,음으로 양으로 깨트려 준 샛별 같은 그 선생님

 

당신이 날 깨뜨렸으므로 혁명의 눈을 초롱초롱 떴네

한번뿐인 생달걀,생이 한번뿐이라는 걸 가르쳐 준 그후부터 나는

익지 않으려 기를 쓰며 사네.그러나 하마터면 나 익을 뻔 했네,

익으면 나 부화될 수가 없네

 

깨트려 주는 것과 깨지게 한 것과 망가뜨린다는 것의 차이점을

사전 속 아닌 필생 부딪히면서,익지 않으려 애쓰면서 에그,

하마터면 또 홀랑 반숙될 뻔했네

 

 


 

 

박숙이 시인 / 초대

 

 

어둠에 불지를 사람 우선 초대합니다

가슴이 와인 빛깔로 타오르는 사람

억새처럼 낭창낭창 달빛을 흔드는 사람

빈 손 흔들며 기적소리와 이별한 사람

창호지 같은 제 몸에 물 한 모금 뿜어줄 친구 없는 자,

곤랍합니다 라고, 거절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사람

허공만 죽자하고 헤엄치다 온 사람

詩集 속으로 들어가 풍화가 된 사람

산머루처럼 혼자 앓다 툭툭 터진 사람아

아무러면 어떻소 세월만 가구려 하는 자

 

지난겨울부터 추위와 헌 책이 함께 살고 있는 집,

찾아오신다면

이 집 주인인 어둠이 맨발로 달려 나가리다

12월 31일 25시

정 찾기 힘들거든

바람이 놀고 있는 공터에게 물어 보세요

공터 같은 여인네 집이 어딘지,

아 참, 눈보라 섞인 노래 한 소절 장미 속에 넣어 오셔요

초콜릿 섞인 추억의 밤은 제가 준비해 둘 테니까,

혹여 팔조령을 만나거든, 밤안개도 초대한다고 꼭 전해 달라 하세요

무량의 밤을 함께 꼴딱 지새운 안개, 참으로 잊지 못하노라고

 

 


 

 

박숙이 시인 / 커트를하며

 

 

확 쳐 주이소

구질구질 할 바에야 차라리

짧게,

축 늘어진 내 의식을 잘라버리렵니다

어느 것이건 길이만큼, 생각 또한 길어지기 일쑤여서

세팅으로 탄탄히 말아 올린다 해도 축 쳐지는

의욕,

머리칼도 이젠 꽤 지쳤나 봅니다

웨이브하나 없는 삶,

꼿꼿이 서지 않아 화학약품에 의존하는 나이인지라

모든 것을 이젠, 짧은 쪽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헝클린 生의 아득한 뒷부분까지도

커트를 하면 조금이나마 커버될 수 있을지,

확 쳐 주이소

잡념뿐만 아니라

소리 없이 드러눕는

게으른 내 의식조차도 시퍼런 그대 감각으로 확 쳐 주이소

반듯한 가르마 하나만 남기고. . . . . .

 

 


 

박숙이(朴淑伊) 시인

경북 의성 출생. 1998년《매일신문》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9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활짝』 『하마터면 익을 뻔했네』 등. 2019년 <서정주 문학상> 수상. 청구문학대상, 신라문학대상, 2009 대구문학상. 현재 대구문인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