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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이 시인 / 황태덕장에서
습관처럼, 명태의 알몸을 덕장의 여자가 만지작거린다 온몸의 근육을 쭉 뻗는 명태, 한 몸을 수백 번, 허기진 남정네처럼 고루고루 만져줘야만 한단다 그러고 나면 그 뻣뻣하던 것이 때깔부터 확 틀린단다 손맛을 느낀 후에야 황태의 구실을 제대로 한단다 죄책감이 든다 내 손을 아낀 죄, 손에 큰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나의 손맛을 충분히 상대가 느껴보도록 해주지 못한 죄 시 쓴답시고 생파리같이 요리조리 피하기만 한 죄 애정이 목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얼었다 녹았다 성깔을 드러내는 우리 집 명태, 아 저 담백하고 뻣뻣한 명태를 황태로 거듭나게 하는 길은 오직 짭조름한 조개껍질 같은 작은 손 하나였구나!
박숙이 시인 / 거두다
적막이 살을 슬슬 파고드는데 마당 귀퉁이 늙은 춘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올곧은 열매를 거두려면 한파 속의, 쌔빠지게 키운 피 같은 꽃을 과감히 버려야 하나니’
딸자식 시집보낸 뒤 그간, 그냥 그렇게 무심히 지나쳤던 홍매화의 그렁한 낙화가 갑자기, 장경동 목사님 설파처럼 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다
박숙이 시인 / 단풍이 곱게 물들었네요
고운사 숲길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네요 이 순간을 전하려 1분 안에 그대 기슭까지 수십 번 갔다가 되돌아옵니다
벅차오르는 단풍이 첫 마음처럼 순식간에 갈 데까지 가버릴 것만 같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사무치는 이 가을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박숙이 시인 / 라이벌
들여다보면 저 들판 꽃만 있는 게 아니네
꽃 사이사이에 잡초가 관계처럼 끼어 있네
뽑을까 벨까 망설이니, 아서라 선배가 한사코 말린다
생각해 보렴 풋풋한 저 라이벌 때문에 긴장하며 네가 널 피워내질 않았는지, 미워하지 말거라
세상에 꽃만 있다면야 어디 네가 꽃이더냐!
박숙이 시인 / 하마터면 익을 뻔했네
맨 처음 나를 깨트려 준 생솔 같은 총각 선생님, 촌 골짜기에서 올라와 혼자 제자리 찾아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불안 불안한,갑갑한 이 달걀에게 여러 정신이 번쩍 들도록,음으로 양으로 깨트려 준 샛별 같은 그 선생님
당신이 날 깨뜨렸으므로 혁명의 눈을 초롱초롱 떴네 한번뿐인 생달걀,생이 한번뿐이라는 걸 가르쳐 준 그후부터 나는 익지 않으려 기를 쓰며 사네.그러나 하마터면 나 익을 뻔 했네, 익으면 나 부화될 수가 없네
깨트려 주는 것과 깨지게 한 것과 망가뜨린다는 것의 차이점을 사전 속 아닌 필생 부딪히면서,익지 않으려 애쓰면서 에그, 하마터면 또 홀랑 반숙될 뻔했네
박숙이 시인 / 초대
어둠에 불지를 사람 우선 초대합니다 가슴이 와인 빛깔로 타오르는 사람 억새처럼 낭창낭창 달빛을 흔드는 사람 빈 손 흔들며 기적소리와 이별한 사람 창호지 같은 제 몸에 물 한 모금 뿜어줄 친구 없는 자, 곤랍합니다 라고, 거절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사람 허공만 죽자하고 헤엄치다 온 사람 詩集 속으로 들어가 풍화가 된 사람 산머루처럼 혼자 앓다 툭툭 터진 사람아 아무러면 어떻소 세월만 가구려 하는 자
지난겨울부터 추위와 헌 책이 함께 살고 있는 집, 찾아오신다면 이 집 주인인 어둠이 맨발로 달려 나가리다 12월 31일 25시 정 찾기 힘들거든 바람이 놀고 있는 공터에게 물어 보세요 공터 같은 여인네 집이 어딘지, 아 참, 눈보라 섞인 노래 한 소절 장미 속에 넣어 오셔요 초콜릿 섞인 추억의 밤은 제가 준비해 둘 테니까, 혹여 팔조령을 만나거든, 밤안개도 초대한다고 꼭 전해 달라 하세요 무량의 밤을 함께 꼴딱 지새운 안개, 참으로 잊지 못하노라고
박숙이 시인 / 커트를하며
확 쳐 주이소 구질구질 할 바에야 차라리 짧게, 축 늘어진 내 의식을 잘라버리렵니다 어느 것이건 길이만큼, 생각 또한 길어지기 일쑤여서 세팅으로 탄탄히 말아 올린다 해도 축 쳐지는 의욕, 머리칼도 이젠 꽤 지쳤나 봅니다 웨이브하나 없는 삶, 꼿꼿이 서지 않아 화학약품에 의존하는 나이인지라 모든 것을 이젠, 짧은 쪽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헝클린 生의 아득한 뒷부분까지도 커트를 하면 조금이나마 커버될 수 있을지, 확 쳐 주이소 잡념뿐만 아니라 소리 없이 드러눕는 게으른 내 의식조차도 시퍼런 그대 감각으로 확 쳐 주이소 반듯한 가르마 하나만 남기고.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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