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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태현 시인 / 보따리 속에 자아(自我)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9.
안태현 시인 / 보따리 속에 자아(自我)

안태현 시인 / 보따리 속에 자아(自我)

 

 

보따리 속에 자아(自我)에게 묻는다

 

너는 왜 거기에 있는 거냐고..?

그는 역시 묵묵무답( 默默無答}

 

숨을 곳이 그렇게 없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래도 역시 묵묵무답(默默無答) 이었다...

 

거기에 눈보라가 지나갔다

거기에 참새 무리는 나무 가지 위 노닐고

지저 김에 놀란  벗꽃들의  움 틈에

커피잔에 드리운다

 

뜨는 시선이 목련 속 들여다 보니

뜨는 보따리의 속삭임으로

귀, 기울이는 듯  달콤한 이야기로 ...

 

다시금 물어본다

너는 왜 거기 숨어 있느냐고...

 

찾아가는 향기

고즈넉히 자리한 고찰(古刹)의 목탁 소리로

다시금 깨어지는 고요의 앙탈...

 

 


 

 

안태현 시인 / 발목

 

 

 파스 좀 붙여다오

 

 아흔일곱 노모가 퉁퉁 불어서 생의 물금이 희미해진 푸르스름한 발목을 내밀었다

 

 가출한 내 행방을 찾아 불갑사 일주문까지 한걸음에 내달리고  눈보라 치는 날 종종거리며 장꾼들 국밥을 말던

 그 발목이었다

 

 한국동란 피난길에 죽을 고비가 몇 번 있었는데 어린 자식을 안고 쇳덩이처럼 무겁게 끌고 가던

 그 발목이었다

 

 해방되던 날 거리에 나가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부르다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린 것도 몰랐던

 그 발목이었다

 

 일본 순사에 쫓겨서 겨울 바닷가 채취선에 고양이처럼 숨어들어 있다가 담배 보따리와 함께 석고처럼 굳어버린

 그 발목이었다

 

 이제

 더는

 발목 잡힐 일 없는

 삭정이 같은 마지막 발목이었다

 

-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2021)

 

 


 

 

안태현 시인 / 물가에서 만져지는 물집

 

 

 까만 정장을 입은 채 물가에 앉아 있다

 

 햇살은 기울고

 

 죽은 듯한 바람이 다시 일어서 해묵은 갈대들의 그림자를 들추자 아픈 내 근황이 피부처럼 비춰진다

 

 세 살 아이가 눈송이라 부르던 꽃잎들은 축제를 마친 인파처럼  고단하게 돌아가고

 무허가로 부풀고 있는 푸른 거푸집들

 

 사라진 것과 사라지려는 것

 어느 것이

 사람들의 심중에 가까운가

 

 물가에 앉은 사람들은

 무른 무릎에 꽃잎을 다시 불러보는 시절이 있는 것 같고

 밥 냄새 풍기는 사립문 밖에서

 검은 염소들이

 뿔로 툭툭 치며 저녁을 몰고 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전속력으로 날아본 적 있는

 

 새들은 무거운 날갯짓을 버리고 공중에 안겨든다 잔잔해지도록 스스로를 다독이는 물결들

 

 끝내 꿈을 부정하다 잠긴 목소리처럼

 물집이 만져진다

 

 들어가 본 적 없는 물의 집

 언젠가 드러날 모래톱에 누우면 일생이 다 소비될 것 같다

 

 


 

 

안태현 시인 / 침묵속에 허울

 

 

허울 속에 빠져든다

 

말이 없다

입을 굳게 닫고

시 안태현

조용히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희미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의 지저귐 속으로 파고든다

 

고독(孤獨)을 묻는 이에게

고독(孤獨)에 젖는 그에게

고독(孤獨)으로 흐느끼는 노래로

 

달빛조차도

말 없는 고요로

구름에 묻혀 가는 빛에 잠식(蠶食)

 

어느새 다가온 파랑새의 춤은

너울너울 공간을 타고 흐른다

 

거기에

허수아비 하나를 세워 놓고는

생각에 잠기는 그리움의 나래

밤은 어딘가 숨어 있는 빛을 찾아 나서고

 

그리고

어울려 춤의 곡예(曲藝)로

허공을 배회(徘徊)한다.

 

 


 

 

안태현 시인 / 망아지는 오늘도 땡볕에서

 

 

쓸쓸함을 묶는

고독(孤獨)의 날

긴 통로(通路)의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쉼을 찾는

외로운 비루먹은 망아지

끄덕끄덕 고갯길을 걷는다

 

땡볕 누누이 쪼이고

흐르는 땀으로 범벅인

망아지의 긴 혀

살려 달라 하늘에 애원(哀願)한다

 

주인장 소나기 한 줄 놓아주면

후유 긴 안도의 숨

 

지나고 보면 행복(幸福)이어라

지나고 보면 행복(幸福)이더라

 

이렇게 삶은

누이고, 누이고 가는 길

 

결코 다시 오지 않는 生이라

다가옴은 행복(幸福)이라 여기며

반갑게 맞이한 망아지

오늘도 땡볕에 헉헉댄다

 

길게 늘어진 혀

줄줄 흐르는 침샘.

 

 


 

 

안태현 시인 / 탁발

-루앙프라방

 

 

꽃 피는 일만 생각하다

꽃 진 자리

흔한 한 끼도 없이 홀로 건너가야 하는 강

매어둔 배는 없고

 

돌아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나와 당신들

 

가령 다 보여줄 수 없는 강가의

희고 검은 날씨 같은

 

해를 넘길 때마다

새로 지은 밥처럼 따뜻한 영혼이란 말을 좋아했지만

뻔뻔하고 뻣뻣하고 빡빡한

씀씀이가

내 침몰의 원인

 

그러니까 더 엎드려보라는

 

붉은 가사를 입은 꽃들이 문턱을 넘어서 마당을 지나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까지 배웅할 때가 있다

 

이게 생시인사 꿈인가 싶어서

가진 모든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아무것도 지불할 수 없는

눈물과 열매들

 

내가 이것을 알고 있는 게 가장 무섭다

 

 


 

 

안태현 시인 / 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모처럼 홀로 되어

묵은 때 씻겠다고 뭍에서 섬으로 건너오니

휘파람새가 운다

 

가파른 비탈에 뒹구는

동백꽃 숭어리들

 

섬에서는 나를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싸구려 옷을 좋아하고

허술한 민박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내 생의 농도

너무 묽은 게 거슬리고

너무 끈적이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술집에서

바다에서

점집에서

나사 한 개가 풀린 것처럼 낭비가 필요한 내 감정들

 

꽃 질 때 우는 새도 있는데

너무 우는 일을 잊고 살았다는 것인가

등 돌리고 가서는

밥 한 공기처럼 웃는 일이 많았다는 것인가

 

나를 태운 이 섬이 둥둥 떠서

망망대해로 흘러가면

홀로 우는 휘파람새가 되어도 좋겠다

 

파도에 밀리고 밀리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끝내 시처럼 살아내도 좋겠다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상상인

 

 


 

안태현 시인

전남 함평 출생. 광주교대, 대진대 교육대학원 졸업. 2011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이달의 신간> <저녁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산문집 <피아노가 된 여행자> 〈교원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을 수상. 현재 경희초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