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일 시인 / 수막새*의 미소
지구 밖 어디쯤을 기웃거린다는 당신이 수소문해 보내준 미소를 오늘 받았습니다 들풀처럼 손끝이 떨렸습니다. 마저 시들기 전 한 번은 보고 살자던 밀약이 떠오릅니다 수천 년이 지난 후 흙더미 속에서 발굴된 미소라 했습니다 망연하게 떠도느라 턱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아낙의 나와 흙 주무르는 일밖에 몰랐던 당신의 토속 시절 천년 고도 어느 비탈진 땅에서 머리를 맞대고 누워 듣던 여름비가 생각나는지요 거스르는 바람 소리에도 꾹꾹 웃음이 나던 뭉개진 혀로 흙만 찍어 먹어도 헤실거려지던 신라의 달밤이었던 우리는 서로를 앓는 환청이었을까요 낯선 외지에서 보낸 시간의 변방은 징용이었습니다 한철의 순간이 추문으로 돌기 전 찾아든 미소가 어쩌면 내 생의 가장 빛나는 귀환이었습니다 귀퉁이를 잃고서야 비로소 완성에 드는 꿈 손을 뻗으면 시야가 사라지는 허공의 외전 外傳을 읽습니다 잃어버린 수막새 반쪽을 맞으러 갈 채비를 합니다. 깜깜히 놓친 시간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처연함일까요 부유하던 미소가 피어날 시간입니다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1934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돌아온 환수문화재로 2018년 보물로 지정됨
조수일 시인 / 당신을 읽다
잎 지는 가로수, 신호등에 걸려서였을 거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는데도 머쓱한 웃음이 뚝, 떨어진 것은
적의 없는 바람이 훑고 가고
이쯤이 당신을 돌려세울 지점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
돌아서 참새 같은 눈물 두어 방울이 나를 실금 내겠지만
서럽도록 집착한 계절이었어
울긋불긋 물들 수 있으리란 마음은 허상이었는지도 몰라
흙속 부르튼 시간을 건너뛴 생략된 마음이 문제였어
두근대는 심장 소리이면서도 우린 포개진 어둠으로 눕고 말았으니
기웃거리다 광합성 작용도 못 하고 만, 해 짧은 날들
나 문득 푸르고 정다웠던 당신을 버리려고 해
가을날처럼 웃던 흰 이만 기억할 게
싱싱한 맨몸으로 오래오래 꽂힐 먼 어느 날의 당신
조수일 시인 / 그리움은 그리워서 길을 내고,
객점의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신다 한낮의 열기가 다스려지는 시간이다 찻잔 속으로 낯선 이국의 노을이 지고 있다 차창 밖으로 스치던 끝없이 이어지던 붉은 수수밭과 솟을 듯 여린 몸빛인 채 일제히 한곳을 향해 흰 목덜미 비스듬히 기울어 있던 포플러나무의 군락,그 쏠림에 대해 생각한다 찰랑이던 갸륵한 행렬을 생각한다 쏠림은 그가 무한량인 바람과 무한량인 모래바람을 홀로 지켜낸 그리움의 상흔이라고,되짚는 사이 멀리 두고 온 내 그리움을 만져졌다 어둠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낮에 본 육중한 산 그림자가 애써 걸어온 길들을 서둘러 지우고 있다 내 그리움도 하늘 기슭 어디쯤 쓸쓸한 바람벽으로 서서 저물어 가는 울음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없는 이국의 모든 저물녘은 방풍림 같은 목덜미 희디 흰 즐비한 슬픔이라고, 자꾸만 찻잔은 비워져 가고 어둠은 허해지고 있었다
조수일 시인 / 먹갈치 야행성이었다 달이 뜬 후에야 낡은 통통배를 밀고 바다로 향했다 대낮엔 모래 틈이나 펄 바닥에 엎드려 밤을 기다리는 갈치를 닮았다 딱 한 번 흙탕물에 발이 빠졌을 뿐인데 당신의 얼룩은 평생을 따라붙었다 어둠이 더 편한 밑바닥의 생 북항의 밤은 늘 멀리서 찬란하였다 날렵한 지느러미에 주눅 든 새끼들을 싣고 밤하늘의 유성을 따라가고 싶을 때도 있었을까 은빛의 유려한 칼춤으로 자신의 바다에서 단 한번도 刀漁가 되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 갈라터진 엄마의 울음이 뻘밭에 뿌려지던 날 마지막 실존이었던 銀粉마저 다 털려 유영의 꿈을 접었던 평생 들이켠 바다를 다 게워내느라 갑판 위가 흥건했다 짠물을 다 마시고도 채우지 못한 허기 삶을 지탱하는 힘이 어쩌면 꿈을 좇는 허영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갈치 떼 가쁜 숨 몰아쉬며 눈먼 만삭의 어둠 속에서 습관처럼 살점 저며주고 뼈만 남은 먹갈치 한 마리 또 한 번 서툰 몸짓으로 비상을 꿈꾼다
-제25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조수일 시인 / 광야에서 부르는 싯딤의 노래
당신 내부로 흘러드는 게 꿈이었어요 정오의 반짝이는 등지느러미 떼, 여름 숲을 몰아오는 한 소절 푸른 허밍은 기원 없는 소요일까요 긴 혀 날름거리는 초식의 풀들과 붕붕대는 벌 떼의 노략질에도 울지 않는 나는, 의기양양 가시선인장처럼 독해져 갔어요 수백 배 뿌리를 내는, 한 방향으로 외로이 쏠린 광야의 싯딤*이기도 했으니까요 이글거리는 햇살과 모래바람이 나를 비켜간 적 없으나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으로 한껏 몸 굽히면 그뿐, 더러고적한 밤 별들이 내려와 나를 변주해도 끄덕 않는 안으로의 옹심은 도태일까요 유물일까요 벼랑이었던 하루하루의 날 세운 가시가 어느덧 이파리 쪽으로 숨어들고 있어요 소용 잃은 낱장, 이파리와 향기 사이 당신의 당도는 어느 쯤일까요 범람해 향기의 발원이란 이름을 얻은 나와 급진적으로 버름거리는 하 많은 당신, 혼미한 포획을 꿈꾸나요
보아요 탐스런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앗, 까시 까시들
눈물 같은 기꺼운 싯딤들
조수일 시인 / 봉숭아의 독백
한 철은 너무 짧아요 난 아직 피우지도, 붉게 물들지도 못했는데 어둑어둑 비는 내려요 폭삭, 질까 두려워요 여린 내 입술, 뭉개질까 겁이 나요 내 그리움의 꽃술 안쪽, 아직 반짝이는 눈물로 자라고 있는데 어둑어둑 비는 내려요 아무도 몰래 난 영글어 가고 있어요 까맣게 영글어 누군가의 지친 등걸에 발아될 허기진 꿈, 어둑어둑 비는 내려요 아직 단꿈에 젖고 싶어요 하롱하롱 첫눈이 내리는 날 아득한 눈길로 사랑을 이루고 단 한번, 순결히 허락될 잠, 감미로운 늑골에서 깨어날 아침을 난 목 빼물고 기다려요 노을이 지고 밤이 내리듯, 기다려요 어둑어둑 비는 내려요 발밑으로 어둠이 한 장, 철렁 떨어져요
조수일 시인 / 들키고 싶은 적막
옥수수 밭을 지나요 쑥쑥 자란다는 말, 거스르는 순간 같아요 한 꺼풀 벗겨 연둣빛 그물맥 옷을 지어 입고 싶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친 듯 위태로운 목덜미에 자꾸 눈이 가요 순간을 꿰차고 마구 달리고 싶어요 겅중겅중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원을 달리던 아프리카 곱슬머리 마라토너의 검은 발목이 생각나요 가슴까지 차오르는 무릎의 각도는 철 지난 사랑을 들추는 푸른 허밍일까요 쏴쏴,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음에 더는 속지 않을래요 한껏 휘청거리는 위태로움도 키를 늘려가는 당신의 방식이라고, 애써 들키고 싶은 적막이라고, 독점하는 비밀을 나, 키워 갈래요 흉곽 속의 순간을 들숨처럼 길들이고 있어요 보아요, 당신의 은빛 갈기가 돋았어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현숙 시인(동시) / 해가 풍덩 외 6편 (0) | 2026.01.19 |
|---|---|
| 안태현 시인 / 보따리 속에 자아(自我) 외 6편 (0) | 2026.01.19 |
| 박숙이 시인 / 황태덕장에서 외 6편 (0) | 2026.01.19 |
| 신민철 시인 / 행복찍기 외 6편 (0) | 2026.01.19 |
| 유수진 시인 / 경계에 대하여 외 6편 (0) | 202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