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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문영 시인 / 이국취향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0.
전문영 시인 / 이국취향

전문영 시인 / 이국취향

 

 

사격장에 가면 누구나 남의 권총으로 쏜다

가끔은 옆 테이블의 외국인을 위해 외국어로 대화하는 문명인

다소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그 모든 사태를 날씨라고 해도 좋다면

엿보거나 엿듣는 일 모두 이미 기후의 영역일 테고

 

남의 집 테이블은 늘 대륙처럼 넓고 항상 이국의 과일만 놓여있다

현관의 열쇠 접시처럼 딱히 먹으라고 둔 건 아니지만

네 입술은 벌어지고 그때 언뜻 비치는 치아는 제 온도에 떠는 유빙이다

대개 빙하는 수심을 감추는 일에 관여해서

 

사격을 마치면 넌 꼭 선글라스를 쓰고 내게서 멀어져갔다

 

 


 

 

전문영 시인 / 개의

 

 

'개'라고 말할 때 우린 이미 조심스럽다

'뱀'이라고 말할 때도 장갑을 끼고 악수하긴 하지만

개가 안 보이면 아무래도 개조심이라는 말을 대문에 써 붙이게 되니까

그러면 개는 우리 집에 있는 셈이니까 안심이다

 

: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개가 없다

 

그런데 개가 없다고! 소리치면

언제까지 거기에만 매달려있을 거야! 아내는 소리 치고

우린 공원에 갔다가 개를 데려오려면 목줄을 동반하라는 경고문만 읽고 돌아온다

목줄이 동반자라면 애가 없는 부부에게 혀를 차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누군가는 우리에게서 개의 목줄만 질질 끌고 다니는 한 행려병자를 봤겠지

 

: 그러니 너를 개라고 하자

 

아 여러분 나는 개인가 봐요.

개의 요건은 무엇인가: 꼬리가 네 개 다리가 하나

아 여러분 기뻐하세요 저는 개가 아니었어요.

개는 장갑을 다 먹으면 죽는대: 니가 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이걸 다 물어라.

 

내가 장갑을 다문 사이에도

개들은 우리 곁을 지나갈 수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내가 그 옆을 지나가도 딱히 상관은 없다

하나 둘 셋 넷... 아무 이유 없이, 개처럼

 

그 사이 목줄은 뱀의 허물처럼 수풀에 버려져있었다

누군가는 그걸 잡고선 뱀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매달릴 곳이 없어졌는데도

아내는 철봉처럼 비감한 얼굴로

적당히 장갑을 징거매고 있었다

 

 


 

 

전문영 시인 / 짖는 소리​

 

손이 크다고 악수를 잘하진 않듯이

나보다 입이 큰 이웃의 개는 짖지 않는다

짖지 않는 개에게만 손이 온다

나는 자주 개처럼 짖기에

손이 자주 비나보다

개도 아니면서 짖지 좀 마라

사람들은 뒷짐을 지며 내게서 멀리 찢어지고

입이 커서 이웃의 개는 짖지 않는다

어디 이 개가 어디까지 짖지 않나

우리 모두 한 번 큰 손을 줘봅시다

손! 손! 손!

손들이 짖으니 비는 손이 없다

제가 컹 짖어야 그칠 박수라는 걸 개는 아직 모르고

손 그리고 손

나는 오래전에 찢어진

내 오른손과 왼손을 조용히 악수시키며

홀로 빈손을 기다렸다

 

 


 

 

전문영 시인 / 애비

 

 

모두 제 위치에 서주세요

오늘도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절벽이 배경입니다

언덕에선 변덕스런 지평의 수위를 감시하느라 눈을 깜박일 수가 없다는 말씀

사진을 찍어내면 사진과 사진 사이의 상황만이 성황리에 서식지를 잃고

맥이 끊어집니다 개체들이 서로 멱을 잡다가 제자리에서 고기가 된다는 거죠

코끼리의 코, 곰의 몸, 소의 꼬리,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톱

이게 진짜 맥(貊)*이라고 날 맥이나요

이제 우리도 남의 악몽을 씹어 먹을 힘이 생겨나요

내가 잘 되는 게 눈물 나게 무서운 사람들의 솜털을 삼키면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나요 그저 무람**만 우람해지는데요

전 맥 빠진 삶으로도 괜찮았는데요

먹기 좋게 고기를 다져주겠다는 어르신들 속삭임에서 누린내가 나요

당신네들 얼굴에서 왜 발톱이 자라나요

네 꿈이 무어냐 묻는 소리가 왜 으르렁거리나요

암실이 아이들 비명소리에 찢어집니다: 이건 내 얼굴이 아니에요!

코끼리의 몸, 곰의 꼬리, 소의 눈, 코뿔소의 발톱, 호랑이의 코!

신경 쓰지 말거라. 아직 풍경을 다 담지도 못했잖니. 더 뒤로 가보렴.

한 걸음만 더 뒤로.

이제 어르신들을 난쟁이보다는 난장이라고 불러드립시다

작아 보이길 주저하지 않으시니

그런데 왜 풍경이 풍성해질수록 고기 썩는 냄새가 심해지나요

왜 나는 절벽도 밑 빠지기 전엔 너머를 가진 언덕이었다는 생각을 하다가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어졌을까요

끝끝내 뒷걸음을 치는 내내 모두의 원위치를 생각했습니다

 

* 貊: 악몽을 먹이로 삼는다는 전설의 동물

** 부끄럽거나 무안하여 삼가고 조심함

 

- 2014년 <문학. 선> 여름호

 

 


 

 

전문영 시인 / 단추의 번성

 

 

구멍을 팠다가 다시 덮으면 구멍을 심은 일이 된다

 

몰래 그 구멍에 악! 비명(悲鳴)을 지르고 나서 그것을 비명(碑銘)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 위를 지그시 누르면 지구 반대편에서 기생음 같은 게 튀어나오는 장면이 덧난다

 

그것을 단추라고 생각하며 구멍마다 비집어 넣는다

 

한 량 한 량 탈선해 옆으로 누워 헛발질을 할 때만 움직이는 협궤열차 같다

 

벗어난 길 위에서라도 나란히 놓이면 마비된 물결 시늉은 가능하지만

 

단추마다 이름을 붙여준대도 떨어진 단추들을 불러 모을 수는 없다

 

알고 싶었던 이름마다 구멍이 뚫린다

 

착란 이외엔 그 안에서 키울만한 양식이 없다

 

- 2014년 <열린시학> 가을호

 

 


 

 

전문영 시인 / 휘파람

 

 

지옥불은 더 이상 유황의 냄새를 내지 않는다

사과나무 찍어내리는 도끼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

버릇처럼 죽은 사과나무 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천국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면

세상은 모두 우리의 것- 그러나 우리 모두의 것은 아니라

그저 내 자리가 있음에 웃음이 절로 나와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분다

대지는 넓고 분주해 어딘가에선 반드시 뱀을 기르고 있고

내일 죽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려는

심술궂은 친구들도 있다

불이 죽을 때쯤 이젠 아무도 탈옥을 감행하지 않는다고 듣는다

 

홀로 방 안에서 어제 간신히 완성한 스웨터를 뜯어

다시 둥글게 뜨개실로 감아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언제나 쉭쉭

누군가 사과나무를 흔드는 소리가 들린다

사과는 굴러굴러 우리 모두의 침대밑에서 고개를 들고

우리의 발아래를 걸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에

언제나 침대 밑을 확인하고서야 잠들 수 있는 자들은

자청한 기아 속에서 썩어 가는 사과 냄새를 신처럼 견디고

아침이면 그 모든 걸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남은 실오라기들을 바닥에서 집어 올린다

 

 


 

 

전문영 시인 / 인기척

 

 

 처음 마음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죽었을 때

 

 어떤 신음은 곰의 심장까지도 기어오르고

 그저 느낌이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만 한다

 형식을 갖출수록 내가 가진 게 더 뻔해지니까

 이때의 감정은 포기하거나 혹은 취소하거나

 

 더 비참해지기 전에

 

 마음을 즐겁게 갖자!

 즐거운 마음이 세를 불리면 즐거운 마음만 차고

 이쯤 되면 마음은 부족할 게 없다

 

 그렇지만 마음이 뭘 하니

 

 맞은편 아파트의 여자는 매일 아침 복도 난간 벽에 대고 이불을 팡 팡 소리 나게 턴다. 그건 마치 타들어 가는 아파트의 불길을 잡으려는 몸부림 같고 혹은 간밤 내내 잠자리가 타들어 갔고 이제야 그 재를 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자 는 때로 울고

 

 나는 마음밖에 없어서

 마음만 쓰고

 마음을 다 쓰고 나면

 내 길을 간다

 그러니까 마음이 하는 게 뭐니

 

-계간시 전문지 포지션 2017년 겨울호, 신작특집-

 

 


 

전문영(全文英) 시인

1984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2013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신인 시인상으로 등단. 2013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