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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화 시인 / 충청도 아줌마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할 수 없다 왜 이럴까, 왜 이럴까 만사가 심드렁하다 거짓 증언은 당당하고 검은 돈은 대단하다 몇 억, 몇 십억, 몇 백억이란들 무관하게, 무관하게 살이 보동보동한 사람아 오늘은 우리끼리 그리워하자 생각도 하 기가 차서 시를 쓰다 파(罷)하고 그리운 사람 아득한 날 충청도 아줌마 노래로 해갈하고 저런 저런 새빠지게 거짓말은 못하니 미친 듯이 지랄 속에 고꾸라지자 도리 없다, 도리 없다 옥아진 마음 둘 데 더 이상 없으니 우리끼리 알싸하게 그리워하자
강세화 시인 / 겨울 맛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이 서려야 맛이다
강세화 시인 / 겨울나무를 보며
겨울나무를 보면 일생을 정직하게 살아온 한 생애를 마주한 듯하다.
나이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고 섭섭해하지 않는 풍모를 본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간소한 마음은 얼마나 편안할까?
노염타지 않고 미안하지 않게 짐 벗은 모양은 또 얼마나 가뿐할까?
겨울나무를 보면 옹졸하게 욕하고 서둘러 분개한 것이 무안해진다
강세화 시인 / 겨울 소나무
사람은 서로 기대고 살도록 생겨나서 누구든지 기대지 않으면 못 견디는 법이다.
오면 가면 눈길이 가는 상대를 만나면 모르는 사이에 홀린 듯이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음 편히 다가갈 데가 안 보이고 살갑게 반기는 인정조차 얼어버린 계절이 되었다.
떳떳이 다정한 눈치도 보이지 못하겠고 염치가 빤해서 선선히 말도 붙이지 못하겠고
어쩌자고 동해 바닷가 홀로 우뚝한 바위를 차지하고 허리가 굽었는지
대책 없는 고집 때문에 사철 막막한 소나무는 속이야 어떤지 몰라도 하릴없이 추위를 껴안고 있다.
강세화 시인 / 빈틈
내 마음에 한 자리는 호박*처럼 비워놓고
계산하지 않고 들어오실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 안에도 어느 한 틈이 있어
내가 거기 무작정 들어가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호박 : 확(절구의 파인 부분)
-시집 『별똥별을 위하여』 청라, 2018
강세화 시인 / 水仙花(수선화)
가시내야, 꽃이 피었다 저승을 갔다가 되짚어 온 영혼이 싱둥싱둥 뛰면서 반가운 말도 다 못할 조고만 가시내야 너를 닮은 꽃이 피었다 잠잠히 어리는 기운이 말쑥하고 숫기없어 첫눈에 반하여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꿈처럼 피어나는 꽃잎에 그대로 담겨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또 변해있어도 내 맘 변하기 전에 너는 변하지 말아라고 샘물가에 빌어온 줄 알거나 모르거나 아주 판에 박은 듯이 너를 닮은 꽃이 피었다 속으로 아무도 몰래 그리움을 품은 가시내야 이 풍진 세상에 아직도 숫보기로 남아서 제시날로 낮은 그림자 꽃이 피었다.
강세화 시인 / 대보름 달을 보며
떳떳한 마음으로 소망을 외고 빕니다 가슴을 채우고 남은 여백이 선선하고 내놓아 부끄럽지 않은 속살이 떠오릅니다 대보름 달을 보며 달에게 물어봅니다 거짓과 위선이 얼마나 우울한지 빛나고 눈부시지 않은 대답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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