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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시인(장흥) / 바람불던 집
1. 매운 바람이 그해 가을을 흔들어 놓아 어머니와 누이가 주저앉은 곳을 볼 수 없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떠돌고 있는 피붙이들, 골목 꼭대기에서 비릿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욕할 수 없거든 차라리 찬공하고 싶어 예배가 끝나도 어머니는 내려오지 않고 비 오는 일요일, 젖지 못한 것들만 혼자였다
2. 뒤집혀진 우산에 빗물이 새고 있었다 슬픈 것들은 왜 낙차가 큰 것인지 방에 누워 종이배를 접었다 한 쪽에서 물방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쥐새끼 같은 놈 티브이가 고함을 쳤다 바람이 세게 불어 문이 열렸다 유리문 밖엔 누가 서있는 것 깉이 낮인데도 어두웠고 빈 바가지가 수돗가를 구르다 금가고 있었다
3. 셋방 남자는 드라마가 끝나도록 곰팡이 슨 벽지처럼 기침소리를 냈다 쥐가 문지방을 긁어댄 틈으로 아버지 입김이 웃풍을 타고 들어왓다 날카로운 구두소리 들리지 않는 단칸의 꺼져드는 방구들 아래 버들개지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장승진 시인(장흥) / 꽃
구름의 그림자가 슬프게 흔들릴 때 언덕에 핀 꽃들은 바람개비돌지 푸른 꿈 붉은 멍 지닌 것들은 슬픔의 뿌리가 길어서 제자리를 맴돌 뿐 그러다 지쳐 대지의 잠에 빠져들겠지 대지가 큰 하품과 함께 몸을 들썩인다면 꽃가루 가득 날리는 꿈을 꾸다가 이 슬픈 비행은 다시 시작되겠지
장승진 시인(장흥) /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사람들이 밀집한 숲속에 내 비록 나무 한 그루로 있지만 나의 본질은 구름이었네 주변의 물방울들 모두 불러내어 가슴과 머리를 채우고 보면 어느새 나는 흐릿해진 구름 그들이 소용없다 버린 오폐수들이 내 아픔의 근간을 이루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날 선 진실이 되어 내 구름의 실체를 만들어 뭉게뭉게 피어나던 끝에 불편한 밤 폭우가 되어 내린다네 텅 빈 마음은 다시금 숲속 나무들의 습기로 채워지고 그 지독하게 음습한 기운 때문에 나는 뿌리를 벗어던지고 구름처럼 빙빙 떠돌아다닌다네 비를 내려 구름이 편해 질 수 있다면 내리다 그친다 해도 좋겠네 그 뒤로 한결 맑아진 공기와 잠시라도 닿으면 쪼르륵 흘러버리는 젖지않는 잎을 지닌 나무숲 속에서 나는 대기가 불안정한 구름 -〈시와경계 〉 (2022년 여름호)
장승진 시인(장흥) / 표류기
오누이처럼 닮은 우리는 육지와 섬이어서 배가 닿을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였네 먹이를 찾아 육지로 날아들던 새들이 몸을 털며 돌아간 뒤 바다가 깊어지는 소리 그대가 마음을 닫는 소리였네 치솟는 파도가 뱃길 위를 숨가쁘게 꿈틀대면 그대는 무수한 암초 뒤로 숨어들었네 그러나 암초가 없었던들 사랑이나 했겠는가 내 갈비뼈 같은 것들이여 육지의 끝자락이여 정녕 배를 댈 수는 없었네 길과 길 아닌 것의 다툼에서 표류는 예정된 것이어서 한 발치 가까웠던 갯벌을 지우더라도 저절로 길이 열리는 것으로 족했네 해안가에 파도가 거칠게 일던 때부터 사랑이 난무하던 中世의 바다를 이루기까지 가슴앓이 하던 배는 어느 퇴적층에 매몰되어 수압에 마음 졸이는 보물선이 될 것을 생각했네
-시와시학 2002, / 신춘문예 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장승진 시인(장흥) / 아홉 번 째 다리
사랑니를 뽑았다 이제 봄볕 같이 파고드는 아픔은 없을 것이다 마을 버스가 고단하게 출발하는 정류장 아홉 번 째 다리에서 맞이해 줄 너는 없다
조금만 더 자랐으면 어쩔 수 없었겠네요 의사의 말이 신발 끝에서 질척일 때 뿌리 뻗지 못한 것들 발버둥을 치는지 나는 잠시 발을 헛딛고 그때 튄 물은 등 돌리고 서 있는 너의 귓바퀴를 적셨을까
두 시간 동안,거즈를 물어야 했다 디딜 곳 없는 자리 피 묻은 구름이 오래 머물수록 水位만 높아져 거리의 가로수 모두 물에 잠기고 물풀처럼 하늘거리는 거리 수심 깊은 곳이라는 팻말처럼 서서 아침 물안개 속으로 사라지던 너는
-川 동인지 두번 째
장승진 시인(장흥) / 호기심 중독
육 개월 된 회색 줄무늬 고양이 우리 집이 낯선지 자꾸 티브이 뒤에만 숨어 짙푸르게 숨죽이던 어린 눈망울은 이제 호박 구슬처럼 밝고 영롱하다
빙글빙글 도는 동전같이 시시때때로 커졌다 작아지는 눈동자 흥미로운 대상에 부딪혀 정지하는 순간 그 안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난다
원인은 거실에 놓아둔 비닐봉지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다가도 우당탕 쏟아지는 물건들에 놀라면 포탄 피해 몸을 숨기듯 도망친 뒤 발바닥에 땀 나도록 살금살금 다가와 별것 아니구나,털 세운 온몸을 활처럼 당겨 공포심을 쏘아 보내거나 기지개 켜며 발끝까지 호기심을 충전한다
일상은 내버려 둔 봉지처럼 무료해지고 까마득한 하품과 함께 몰려드는 잠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듯 발톱 꺼내 기둥에 박고 캣타워 꼭대기로 층층이 기어올라 케이지 속 담요에 웅크리고 몸에 묻은 권태를 혓바닥으로 핥다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맞추듯 눈과 입을 닫는다
뭔가 심통 난 표정을 띤 채 눈꺼풀 내려 암막 커튼을 친 고양이 커튼을 쳐도 먹구름이 끼어도 그 너머로는 언제나 호기심이 밝은 햇살을 비춘다
장승진 시인(장흥) / 신발
누군가의 한평생을 대신하여 그는 수차례 버려졌다 별 대단한 일을 했냐고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거칠고 냄새나는 발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자기의 고집을 깔창 밑까지 낮추었던 적 있던가 버려질 줄 알면서도 발바닥까지 마음을 읽었던 그처럼
-시집 『물은 나무의 생각을 푸르게 물들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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