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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원 시인 / 초당의 소실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0.
이규원 시인 / 초당의 소실점

이규원 시인 / 초당의 소실점

 

 

생각은 담백하고 가냘픔은 장엄했다

단정한 옷맵시에 움직임은 무거워서

먼 데서 바라본 사의재 소실점처럼 보였다

 

강진만은 바다와 육지 쉼 없이 호흡하고

시대를 거스르는 계절만이 들락날락

초당엔 실학의 그리움 둥둥 떠서 고여있다

 

비 내리는 깊은 밤 혜장을 기다리다

열어둔 문으로 지샌 밤은 몇 날일까

봄 되어 적적하다고 그립다고 눈 감아보던

 

거두는데 급급한 야욕의 탐관오리

또아리 튼 정쟁이 만능을 지향해도

만덕산 차나무 정신은 지금껏 의연하다

 

-《정형시학》 2022. 여름호

 

 


 

 

이규원 시인 / 둥지

저건 무슨 새 둥지일까요?

말라가는 나무에 틀어놓은

작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둥지를 보면 파랑새의 둥지라고 생각합니다

 

저기 둥지가 보이나요?

어디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둥지처럼 뭉친 나의 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을 짓고

짝짓기를 하고

어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본 적 없나 봅니다

 

둥지 안에 알들이 있습니다

교미 없이 태어난

보드랍고 따뜻한 나의 알들

알 속엔 나의 무의식이 자라고 있습니다

 

심장과 발가락과 날개가 생기면

무의식은 알을 찢고 날아오를 것입니다

아직 덜 자란 무의식이 꿈속에서 나를 콕콕 쫍니다

 

둥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계절 내내 있는데 아직도 둥지가 안 보입니까?

사람들은 나의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상처가 하나도 없는 알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이제 그만 깨지려던 알이 다시 단단하게 문을 잠금니다

나의 무의식을 들키는 일이 점점 더 무뎌지고 있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이규원 시인 / 이면지

 

 

앞과 뒤가 다른 것이

어찌 달의 표정뿐일까요

일란성 쌍둥이도 엎어 놓으면 다르다는데

모든 비슷한 것들은 다름을 은닉하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일출과 일몰처럼 입장이 다를 뿐입니다

 

자전과 공전 주기가 같은 우린

서로의 한쪽 면만을 탐닉했어요

환한 곳은 언제나 웃음이 만연했고

표정이 사라지기 전에 비웃음이 재빨리 끼어들었죠

모든 형상을 가진 것들은

검은 웃음과 환한 울음을 구분할 수 있나요

이중성이 누군가의 심장에서

눈을 뜬 채 죽은 듯이 살아있다면

이것은 사랑일까요 집착일까요

시큼한 살 내음과

단 하나의 태도가 그리워진다면

차라리 귀와 입을 봉하세요

그럴 수 없다면 귀와 입을 열고 모두에게 기회를 주세요

 

떠올랐다 가라앉는 감정의 이격처럼

일출과 일몰의 입장보다 더 현격하게

앞과 뒤를 베어 먹으세요

밖과 안쪽

어떤 진부한 것도 다 함의할 수 있는 고도에 닿으세요

 

-《열린시학》2019 겨울호

 

 


 

 

이규원 시인 / 회색(灰色)이 회색(回色)이 되는 순간

 

 

콩닥콩닥은 아이들에게만 있는 감정이 아니야

시들어 가는 모든 것에도 안간힘은 있어서

끝을 떠올리는 건 회색에 대한 태도가 아니야

 

어둠이란 성분이 조금 더 많았을 뿐

난 그동안 농도 조절에 실패했을 뿐이야

 

물론 회색은 언제나 침울했어

아주 묘한 몸짓으로 가시거리를 지웠지

 

희지도 검지도 않은 상태로 외로움을 부추기며

색의 목적에 대해 집착하게 만들었어

 

회색은 답답한 콘크리트를 계속 떠올리게 했지만

난 미명을 품고 있었어

 

파르스름한 빛이 사락사락 스며들 때

난 온몸을 맡길 거야

 

무방비 상태일 때만 다가올 수 있는 회색(回色)을 품을 거야

 

물론 해뜨기 전에 춥겠지

그래서 회색을 뛰어넘기 어렵겠지

 

그런데 그거 아니

내 마음속에 이미 회색(回色)이 움트고 있었다는 걸

 

- <시와사람> 2022, 여름호

 

 


 

이규원 시인

강원도 평창군 진부 출생 . 2015년 《열린시학》시 등단. 시집 『옥수수 밭 붉은 바람소리』 시조집 『가까이 앉으라는 말』. 제11회 열린시학상 수상. 제12회 가람시조 백일장 장원.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제9회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