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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계영 시인 / 기도는 타이밍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0.
김계영 시인 / 기도는 타이밍

김계영 시인 / 기도는 타이밍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가 뭔가 생각했어

허술하게 할 말은 아니지만

어떤 따뜻한 위로의 말도 하염없긴 하지

 

운수가 없는 날마저 좋은 날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해

 

시간이 변수이긴 하겠으나

오르골의 노래 한 곡이

하나의 풍경 속 기억으로 그려질 무렵이면

상처를 벗은 아침이 맑은 얼굴로 네 앞에 다가올 거야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가 뭔가 생각했어

 

나뭇잎 화석 같은 이미지로 바닥에 떨어져도

어제 걸어온 샛길에서 생소한 발자국 소리를 듣는 건

 

또 다른 날을 기대하며

아직 생활인이란 감각이 살아있는 것일 테고

너는 환한 미소를 지을 거야

 

 


 

 

김계영 시인 / 금강소나무숲길

 

 

시방 비말이 난무하는 안개의 터널을 지나 버스는 새벽을 통과했다

 

우리를 기다리던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은 백두대간을 통과한

오래된 전설의 푸른 지대

유적처럼 숨겨둔 너의 영토를 밟는 순간 내 몸은 가볍다

무심코 들이마신 숲의 바람이거나 금강소나무의 몸이거나

모든 것이 깨끗이 통과하는 순환의 길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지

천년 나무들의 눈빛이 날마다 초록으로 태어난다

본디 제 것이어서 무성한 숲

숲의 맛을 음미 한다

이내 웅숭깊게 익어간 이끼의 길을 따라 올라

고갯마루에 버티어 선 대왕송의 우람한 자태와 포옹하다 보면

한때 일렁이던 청춘의 감정 잠재우고

하늘로 유유히 나는 날개

새털구름의 표정과도 마주한다

 

걸을 수 있음에 이토록 감사한 소나무 숲길에서

우리 땅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겹치는 건 왜?

 

우리의 길은 아직 멀다

오늘도 진행사항이다

 

 


 

 

김계영 시인 / 안개는 소리가 없다

 

살포시 경계를 지운 산과 바다의 포옹 보드랍고 고요하다

서로의 비밀도 묻힌 정물 같은 어떤 세상

 

 


 

 

김계영 시인 / 이끼

 

 

나무 밑둥치 그늘을 에워싸고 있는

푸릇푸릇한 시간들

 

숲의 바닥에 붙어 넓게 퍼져 자라는이름을

너라고 지었을까

 

얼음장 깨지는 소리 들리는데

그늘 지키는 포근함도 들려요

 

낮은 데서 이내 버티며

습기를 품을 줄 아는 너는

숨으려 해도

푸릇푸릇 지상을 품고 있는

주춧돌을 닮았지

 

결코 비굴하지 않은 낮은 자리의 사랑을

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계영 시인 / 인사동에서 꽃불 밝히고

 

 

여인의 손끝에

한빛 꽃잎이 춤추고

한빛 바람이 휘어지고

 

어떤 바람은 엿듣고

어떤 바람은 들어와쉬어가네

 

오월이면

보랏빛둥나무꽃그늘이 환하던

오목대 아래

오붓한울타리 안에서

너나없이

환하게 꽃불 밝히던 우리

 

오월이 떠나가는 여기에

해후이듯

 

한겹한겹

연꽃잎도

환하게 꽃불 밝히고

 

우리는모여서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네

 

 


 

 

김계영 시인 / 화석을 드로잉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물 속이나

깊은 지층의 무게를 품고 나와

지상의 시간에 파고들었다니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의 흔적이다

 

보이는 것마다

미끼를 달고 유지해 온 일종의 부고장 같아

 

생각의 씨앗을 무한정으로 펼쳐가며

그 너머의 세상을 향하여

최후의 몸부림을 지키려 하지만

망각은

어제의 분간을 헤아리기 어려운 적멸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의문만 커지기도 하는 낯선 정체 앞에서

시간의 가늠자로 끊어진 매듭을 이어가며

연대의 보고서에 주목하는 일은

망각의 사무침에 대한 선한 답례가 아닐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김계영 시인

전북 전주 출생. 1998년 《포스트모던 한국문학예술》신인상 등단. 시집 『시간의 무늬』 『흰 공작새 무희가 되다』. 김기림 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기획간사로 활동. 전주MBC 아나운서. 재능시낭송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