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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병록 시인 / 구겨지고 나서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5.
유병록 시인 / 구겨지고 나서야

유병록 시인 / 구겨지고 나서야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한 지금은

안에서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까

 

안쪽에 이런 문장이 구겨져 있을지 모른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지만

어둠은 시간의 죽음, 그 부피를 측량하면 시간을

지울 수 있을 것

 

문장을 완성한 후에야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종이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 눈동자에서 어떤 적의를 발견한 듯이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품 안에서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라는 듯이

 

 


 

 

유병록 시인 / 빨강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 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거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 봐

 꼭 여며 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에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 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었거나 불타는 얼음

 

 이미

 날은 어두워졌는데 얼음에는 관용의 기미가 없는데

 

 몇 켤레의 빨강 발자국이 지나간다 구름 위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사과처럼 몇 개의 붉은 지붕이 빛난다

 

 빨강은 죽어 간다는 증거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다는 증거

 

 色에 빠지면 흑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나는 붉어진다

 홍조를 띤 것처럼 빨강이 되어 간다 불타오를수록

 추운

 

 


 

 

유병록 시인 /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2010. 동아 신춘문예 당선 작품

 

 


 

 

유병록 시인 / 웃음

 

 

 검은 행렬이 이동한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눈 쌓인 비탈을 지나 아주 긴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걸어간다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자꾸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데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다 가슴을 치다 울음을 터뜨리는데

 

 선두에서 죽은 입술이 피리를 부는가 관 속의 두 손이 북을 두드리는가 행렬은 멈춰 서지 않고

 

 예고되지 않았는지 이미 건너간 후였는지 앞세우고 가는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다 죽음이 틈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 살아서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살아서 이만한 대열을 이끈 적 있었던가

 

 수천수만 개의 바구니 같은 눈송이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검은 외투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웃음이 통곡의 대열을 이끌고 행진한다

 

 


 

 

유병록 시인 / 눈사람베이커리와 아프리카 편의점

 

 

 1

 흰 가운을 입는다 눈사람의 몸통에 꽂힌 막대 같은 손으로 밀가루 반죽에 칼집을 내고 오븐에 넣는다 얼마 전 반죽덩어리처럼 누워 있던 아내는 일어나지 못했다 많은 칼집을 지닌 아내를 무덤에 넣고 봉분을 닫았다 익어가는 반죽덩어리에서 모락모락 사라지는 영혼, 노릇노릇해지는 몸, 오븐을 열자 열기가 쏟아진다 봄날의 눈사람처럼 땀이 흐른다 눈과 코, 끝내 온몸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밖을 내다보자 맞은편 편의점이 보인다 아르바이트생이 열어젖히는 냉장고 문, 저 얼음벽돌 속에 녹아내리는 몸을 집어넣고 싶다

 

 2

 편의점은 커다란 냉장고, 주인만이 플러그를 뽑을 수 있어요 천장 모서리에 걸린 볼록거울을 들여다보자 몇 달째 진열대에 처박혀 있는 정어리의 얼굴, 추위가 불러온 잠 속으로 몇 걸음 들어서다 화들짝 도망쳐 나와요 냉동차에 갇혀 죽었다는 사람이 떠올라요 냉기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도 얼어 죽은 사내, 그도 통조림에 갇힌 정어리를 떠올렸을까요 살갗에 얼음꽃이 돋아날 때 적도까지 헤엄쳐가는 꿈을 꾸었을까요 교대 근무자를 기다리는 아침, 동면에서 풀려난 물고기처럼 피를 녹이고 싶어요 맞은편 베이커리, 아프리카처럼 뜨거운 저 오븐 속으로 헤엄쳐 가고 싶어요

 

 3

 눈사람 베이커리와 아프리카 편의점이

 마주 보고 있는 골목

 어쩌다 눈사람과 정어리의 눈이 마주친다

 하나의 심장으로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 샴쌍둥이처럼

 

 


 

 

유병록 시인 / 지붕

 

 

아무래도

지붕을 도둑맞은 것 같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부끄러울 수 없는 저녁

 

길에 생을 마감한 자들의 묘지로 간다

봉분도 비명도 없는 땅

그들은 죽어서도 지붕 아래 있길 거부했으므로

 

머리 위를 무너뜨렸던 것

하늘이 보일 때까지

지붕을 만나 지붕을 부수고 높이를 만나 높이를 부수었던 것

 

지붕이 없으면

온기는 곧 사라지고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데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땅에서

하늘마저 부수던 자들

이마를 다치고 눈이 멀고

끝내 무너져 내리는 어둠에 깔려 숨을 거두었던 것

 

자정의 하늘에는

검고 딱딱한 지붕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매달려 있지만

여기는 돌아눕지 않는 자들의 묘역

 

나는

근엄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이 닿을 만큼

지붕이 가까워질 때까지

 

 


 

 

유병록 시인 / 그것도 집이라고 비는 피할 수 있는 곳에서

한세월을 살다가

 

 

 언덕 공터에서 철근과 콘크리트의 결혼식이 열렸죠

 

햇살이 내리쬐고 바람이 불고 몇 방울 땀이 흐르는 사이  꼭 껴안는 사이가 되었지요 콘크리트의 배가 환하게 부풀어 올랐지요

 

믿어지나요 생면부지의 둘이 만나 휘익 휙 청춘의 달밤을 지나왔다는 사실이 비바람 몰아치는 저녁을 지탱해 왔다는 게

 

내내 살을 맞대고 있었지만 와르르 무너지면 또 서로 낯설지요

 

목을 조인 게 당신의 포옹이었군요 숨 막히게 한 게 당신의 갈비뼈였어요 이렇게 쓰러져 누웠는데 모든 건 지나갔는데

 

아직 당신을 몰라요

 

그렇게 가족이란 우연히 만들어진 구조물인데 콘크리트와 철근은 덮개 없는 트럭에 실려 가지요 함께 달려가다가

 

한데 묻히겠지요 지독한 인연은 끝나지 않았어요

 

 


 

유병록 시인

1982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산문집 <안간힘>. 김준성문학상.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