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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기덕 시인 / 사과의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5.
<동시>

<동시>

권기덕 시인 / 사과의 말

 

 

사실 내 몸속에는 사각형이 살고 있어요

사각사각 사각사각

소리 들리나요?

 

사각의 햇빛

사각의 빗방울이

간질거려요

 

내 붉은 몸속에 감춰진 사각형들은

생각보다 많아서

사각 소리가 쉴 새 없이 나요

어쩌면 사각 벌레와 사각 새가 놀러 오고

사각 바람이 불었는지도 몰라요

 

모서리 때문에 아프지 않냐고요?

각진 마음도 생기지 않았냐고요?

 

글쎄요, 내 둥글 속에 사각형들을

잘 버무렸나 보죠

친구들은 내게

달콤한 행복을 준다며 좋아했어요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바로 사과의 말이니까요

 

원고지 빈칸처럼

사각형으로 온몸을 채워 볼까요?

 

나는 망설임 없이

누군가의

붉고 붉은 문장이 될 거예요

 


 

권기덕 시인 / 구술지도

 

 

 미시시피강을 따라 동쪽으로 4킬로미터쯤 멤피스신전이 보이고 그 언덕에서 바람을 타고 벼랑 끝으로 가면 지도에 없는 길이 있다 북미 인디언에 의하면 그 길은 말하는 대로 길이 되는데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한다 말할 때마다 피는 꽃과 나무는 밴쿠버를 지나 알래스카까지 변화무쌍하게 변형된다 갈색펠리컨이 말했다 소리에 축척이 정해지면 풍문이 생긴다고 풍문의 높낮이는 산지와 평야를 만들고 때론 해안선을 달리며 국경 부근에선 적막한 총소리마저 들린다 말에 뼈가 있는 것, 수런대는 말은 지형의 한 형태이다 낭가파르바트의 눈 속에 박힌 새가 말의 시체라는 설은 유효하다 하지만, 완성된 독도법이 알려진 바는 없다 단지 찢어진 북소리 같은, 언술 너머 죽은 바람을 꽃으로 데려다줄, 음운이 춤을 춘다 죽은 자들이 남긴 것은 결국 어떤 지도에 관한 연대기일 것이다

 

 


 

 

권기덕 시인 / 세면대 위의 맘모스

 

 

냄새도 색깔도 투명한 맘모스

세면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담배를 피운다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맨 채

P의 머리를 툭툭 친다

 

립스틱을 바르며 P가 웃는다

눈을 떼어 코에 붙인 표정이 흘러내리고

혓바닥이 혓바닥을 친친 감아 물뱀을 낳는 아침

물뱀을 털며 세면대 거울이 쳐다본다

 

맘모스 뿔은 모자이다

모자는 낱말이다

낱말은 담배연기다

담배연기는 와이파이다

와이파이는 구름이다

부풀어진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구름을 베어 먹는 맘모스

비대해진 욕실에서 하모니카를 분다

툰드라의 노을빛이 거울에 비친다

 

맘모스가 구부러진 배수관 아래로 사라져 간다

 

 


 

 

권기덕 시인 / 기울기

 

 

지구가 기울어진 채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 알고 있니?

우리는 사실 기울어진 채 살고 있어

 

어제 저녁에도 가족들은

기울어진 텔레비전을 보며

기울어진 식탁에 모여

기울어진 생선을 먹었던 거야

지구가 한 행동이란 걸

도저히 눈치채지 못할걸

우리는 기울어진 채

기울어진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꼬옥 붙어 있었던 거지

 

이제 더 이상 체육 시간

기울어진 채

굴러가는 축구공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기울어진 칠판에

기울어진 분필 글씨는 삐뚜름

기울어지는 학교

기울어진 식판에 놓인

기울어진 반찬 흘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네 얼굴 좀 보라고

 

반듯한 것 주변에서

기울기는 늘 기웃기웃

 

오늘도 혼자 집으로 가는 골목길이 기울고

기울어진 담벼락에 기울어진 채

지나가는 고양이를 볼 수 있겠지?

 

기울어진 그림자를 보며

저 태양도 기울어지고 있어

어쩌면 내가 너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도 당연한거지

 

-시집 <내가 만약 라면이라면>

 

 


 

 

권기덕 시인 / 기타리스트와 이상한 가방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기타를 치던 내게 소년이 말했다 “아저씨 줄 하나가 끊어졌어요.” 맞다 기타 줄은 끊어졌다 끊어진 기타 줄로 음악을 연주할 순 없는 걸까? 아니다 끊어져야 살 수 있다 끊어진 것만이 고요에 저항할 수 있다 끊어진 기타 줄은 원래 끊어져 있었고 애초부터 원곡을 온전히 연주할 생각은 없었다 소년은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린다고 했다 집 나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할 뻔했다 “아저씨 애인 있어요?” “응, 아니.” 나는 애인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끊어진 기타 줄로 연주할 때마다 애인과 헤어졌고 애인이 없어도 끊어진 기타 줄을 연주하면 금세 애인이 생겼다

 

 소년에게는 가방 하나가 있었는데 캐리어라고 말했지만 중국집 양철 가방에 가까웠다 연주가 재개되자 소년은 양철 가방에서 가위를 꺼낸 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고 얼마 후 끊어진 기타 줄을 위한 퍼포먼스라며 밧줄로 내 양발을 꽁꽁 묶었다 양철 가방에서 여성용 화장품들이 쏟아졌고 간혹 새 울음소리도 들렸다 기타 연주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건 차라리 원곡을 흉내 낸 창작곡에 가까웠다 없던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 박수를 쳤다

 

 


 

 

권기덕 시인 / 명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설치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니?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어. 나무가 내 몸속에 달아 놓은 심장 소리가 기계적으로 들리기 시작했지. 이 공간이 포름알데히드 약품 처리되었다면 나는 죽어 있음이 분명하지. 토막 난 몸이 수족관 속에 장식된 건지 모르지. 태엽 인형처럼 밥 먹고 양치질하며 죽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잘린 다리 하나는 개 이빨 사이에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죽어 있음이 분명하지. 태양이 머리 위로 탕탕 못을 박고 있지. 몸에서 못이 튀어나오고 있지. 쏠배감펭처럼 헤엄쳐 보기로 해. 왜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죽어 있음이 분명하지. 부품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검은 새들이 똥을 누고 날아가지. 약품 처리된 게 분명하지. 단지 어딘가에서 내 머리카락이 되살아나고 눈동자가 곰팡이처럼 무한증식되길. 나는 죽어 있음이 분명하지. 토막 난 기억들이 나를 증명할 수 없다면

 

-시집 『스프링 스프링』에서

 

 


 

 

권기덕 시인 / 닫힌 방에서 이성을 거부한 자들이

 창조한 그림자들

 

 

#숲

 

문을 열자 문이 닫혔어

 

코가 사라지고 눈이 멀어졌어

 

입은 잎사귀로 변했고

변해 가는 얼굴빛에 새들이 내려앉았어

 

얼굴은 작은 달이 되어 떠오르기 시작해

 

창문을 열어줘 제발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있게

 

어두워지지 않을 만큼 어두워질 테야

 

손톱은 벽 속의 벽을 할퀴었고

발은 물고기 꼬리로 변해 갔어

 

네 가슴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

 

#비상구

 

너는 시계를 던졌고

나는 내 아름다움을 던졌다

 

우리는 비상구 계단을 내려오며

눈이 내리는 바닷가에 대해 얘기했다

 

계단을 내려가면

역진화가 시작될 수도 있어

 

내려온 계단들은 어느새 흘러내렸고

공간은 물소리로 채워진다

젖은 그림자들이 젖은 손을 빠뜨린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은 잠자리는 왜 날아다니는 걸까?

 

나는 슬픔이 없는 유희에 빠져 허우적댔다

 

#광장

 

출입구가 없는 공간에서 담은 어떻게 쌓아야 합니까?

 

어제로 돌아가면 됩니다

어제로 돌아간 뒤, 다시 그 전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가 오고 이별이 되돌아오겠죠

어쩌면 짐승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제가 본 오늘의 아름다움은 사라질까요?

 

아름다움은 출입구가 없습니다

 

절반이 사라진 그림자가 슬퍼 보입니다

 

#창고

 

어둠 속에 폭설이 내린다

 

손가락을 던지고

거짓말을 만들고

자르다 만 귀를 내버려 둔 채

 

그림자 집을 짓는다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훔쳐

투명물고기가 된다

 

설야(雪夜)는

 

묻어야 할 것과 묻힐 것에 관한

무의식적인 보고서

 

자작나무 우듬지의

새 그림자에 나를 겹쳐본다

 

선반 위에 펭귄들이 가득하다

 

#피팅룸

 

AI 그녀가 AI 옷을 입는다

 

오늘도 주문서를 받아들고 절망한다 귀는 커질 만큼 커졌고 눈은 밝아질 만큼 밝아졌는데 왜 날지 못하는 걸까? 주문서를 찢는다 주문들이 흩어진다 주문을 해결할 수 있는 주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타인의 슬픔도 주문할 수 있나요? 타인인 척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보다 인간적으로 변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AI 고양이를 데리고 AI 나무 아래 슬픈 AI가 된다

 

#공사장

 

완성되지 못한 방은 예술입니다

 

시멘트로 둘러싸인 공사장 안에서 우리는 한 마리 늑대처럼 울부짖습니다 해가 진 뒤엔 더 쏠쏠한 어둠이 찾아올 테니까요

 

바닥에는 합판과 각목, 철근들이 널브러져 있지만, 곧 시멘트와 함께 오브제가 될 것입니다

 

마치 당신 몸처럼요

 

어쩌면 당신은 완성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건너편 상점들로 가득한 건물을 보십시오

 

완성된 방은 노동일 뿐입니다

 

노동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그림자는 예술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귀를 자르고 입을 지운 채 얼굴 없는 얼굴이 됩니다

 

공사장 옆 공터에서 해바라기꽃이 쳐다봅니다

 

 


 

권기덕 시인

1975년 경북 예천 출생. 대구교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 여름호 신인상으로 등단. 2017년 <창비어린이> 동시 당선. 현재 대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시집 『P』 『스프링 스프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