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유니 시인 / 리스닝 룸
사과는 방이 필요 없습니다 비좁은 방에 오래 서면 창을 향해 자라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망치가 바닥을 쓸고 가면 복도가 살아납니다 방 안에는 암살자가 숨어들고 사과는 공포를 몰라도 굴러가겠죠 사과는 하늘이 될 수도 있고 구름이 될 수도 있지만, 방 뒤에 숨어 있는 암살자는 싱거운 바퀴벌레가 돼야 합니다
나는 사과가 아닙니다 아무나 사과가 되는 건 아니고 아무도 사과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냄새를 맡아봅니다 사과 바깥의 세계는 어떤 빛깔입니까 몸을 가두고 귀를 키워 봅니다
이 방의 목적이 무엇이죠 사과는 자신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습니다 정물화 속에서도 굴러가 아무 데나 주저앉죠 거짓말을 모른다며 거짓말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사과는 부동자세에 능합니다 사과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군요 거짓말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킁킁킁 귀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7월호 발표
장유니 시인 / 선인장에게
척박한 땅에 심기어져 강해질 수밖에 없었구나
아무도 널 건들지 못하게 가시들을 박아둔 거니 아니면,
수많은 가시들 널 향해 날아오지만 끈질기게 살아 버티고 있는 거니
그래도 물은 너에게 스며든다
좀 더 견뎌내서 꽃피워보자고 조심조심 너에게 다가와
물은 너에게 스며든다
장유니 시인 / 거울
속도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장유니 시인 / 가을비에 젖은 낙엽
아름답고 따뜻한 이 하루가 날아가지 않도록
알록달록 단풍들을 이 땅 위에 붙여놓는
가을비
장유니 시인 / 오늘
오늘, 적당했다. 바람도 햇빛도 벚꽃잎 흩날림도 운동화 신발 끈의 조임도 식사 후 배부름도 버스 안에서의 쪽잠도 옆에서 미소 짓는 이들도
오늘 참 감사하다 넘치도록.
장유니 시인 / 슈필라움spielraum의 경계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숲속에 나무가 쓰러졌다*고 아무도 쓰러지지 않는 계절이었는데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난 듯하다고 나무가 쓰러진 걸까 내 심장은 캘빈 온도* 거짓말도 얼어붙고 비눗방울도 얼어버리고 꽃말이 뭐든 무슨 상관이냐고 얼버무리며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러기만 하다면 빛의 속도까지 바꿀 수 있다고 나무는 쓰러진 걸까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윙키 위도 28도53에서 모든 나무가 쓰러졌다고 너와 내가 사랑해서 플랭크 길이*만큼 매트리스에서 혹은 매트릭스에서 아무도 없는 아무 숲에서 아무나무가 쓰러졌다고 그날 이후 밤마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쓰러진 건 나였을까 나무가 쓰러졌을까 *경험주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 경의 철학적 명제 *절대온도로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온도 –273도 *길이의 단위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크기
장유니 시인 / 행복
따스한 밥도 같이 먹고 밝은 달도 같이 보고 잔잔한 음악도 같이 듣고 바삭한 낙엽길도 같이 걷고 아름다운 시도 같이 쓰는 이 시간들
지금 모습 속에 미래를 그려본다
망원경을 들고 멀리 있는 모습을 가져와보니
보인다
더 아름다워진 늘 함께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
장유니 시인 / 집 가는 길
오늘 내 눈에 뭔가 묻었는지 달이 뿌옇게 보인다
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달이 뿌옇게 보인다
내 마음에 먼지가 꼈을까 마음을 열어 닦아보면
달이 또렷이 보일까
흐릿한 오늘 하루
내일의 삶은 뚜렷하게 나에게 다가올까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하 시인 / 대숲소리 외 6편 (0) | 2026.01.15 |
|---|---|
| 박찬세 시인 / 벽돌의 방식 외 8편 (0) | 2026.01.15 |
| 한춘화 시인 / 그림자 길게 드리운 저녁 외 5편 (0) | 2026.01.15 |
| 홍성식 시인 / 울란바토르, 겨울 외 6편 (0) | 2026.01.14 |
| 장자순 시인 / 나무와 잎사이 외 6편 (0) | 2026.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