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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성식 시인 / 울란바토르, 겨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4.
홍성식 시인 / 울란바토르, 겨울

홍성식 시인 / 울란바토르, 겨울

 

 

영하 40도의 거리

들숨 속으로 얼음조각이 딸려왔다

무연탄 난방의 낡은 호텔

이방의 사내도 쿠빌라이가 되고 싶다

말처럼 단단하고 실한 허리

완벽하게 둥근 엉덩이를 가진

울란바토르 여자와 밤을 보낸다

모든 신음은 거짓이다

 

토해지는 날숨처럼 대책 없는 초원

풀이 베어진 자리에 도시가 들어선다

러시아의 피가 섞여서일까

도심에 붉은 등이 걸리면

스무 살 처녀들은 웃음이 해퍼지고

말을 잃어버린 사내들은

그녀를 채찍질해 국경을 서성이지만

패배자의 깃발 같은 하얀 입김뿐

 

길들여져 고분고분한 야생마

정복자는 정복하는 방식을 잊었다

어지럼증에 휘청대며 늙어버린 땅

올 굵은 실에 육포처럼 매달린 적장의 코와 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만 떠도는 전설

그것들 모두가 부활의 약속인 양 아프고

위성항법장치로는 황제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도서출판 b)

 

 


 

 

홍성식 시인 / 불혹

 

길 위에서 길을 찾다 길에 눕는다

메마른 얼굴을 쓰다듬는 유년의 바람

해서, 내내 낯선 길만이 매혹적이었다

열아홉, 스트리퍼의 젖꼭지를 본 날

우주는 더 이상 내밀하지 않았고

슬픈 세상사와 상관없이

바다는 살인자의 눈동자처럼 푸르렀다

지문이 기억하는 아득한 전생이 있어

근친상간을 꿈꾸며 살아온 사십 년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한 아득한 진실

하늘은 이미 나를 용서했다.

 

 


 

 

홍성식 시인 / 테베레강, 늑대와 만나다

- 이탈리아 로마에서 _

 

치렁치렁 휘황한 망토를 두른 외경의 교황은 가고

물혹투성이 병자의 얼굴에 입 맞추는 교황이 왔다

바티칸, 믿는 자만이 성소(聖所)에서

민중의 집으로 진화 중이니

프란치스코는 재림한 부활 예수

탯줄 묻힌 아르헨티나

그 이전에 체 게바라가 있었다

신이 아닌 인간을 믿는다라 고백한

아직은 알지 못한다

둘 중 누가 더 큰 사랑과 희생의 예수로 기억될지

캄피톨리오광장과 스페인계단을 채운 이방인들

베니토 무솔리니와 오드리 헵번

이탈리아를 암흑시대로 몰아간 퇴행의 파시즘

자전거를 탄 하얀 여배우의 입술에 묻은 젤라또

그러나 무슨 상관

여행이 아닌 관광을 온 이들은

심각한 생각을 멈추고 바티칸의 비둘기와 논다

이민족 피와 눈물 위에 건설된 제국

뻗어나가길 멈추지 않던 영토는

인간 욕망의 한계 없음을 비명 속에 증명했고

불타는 도시를 보며 시를 읊던 미치광이를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이냐 이스탄불이냐

두 제국 왕의 싸움에 문맹의 노예들만

대포 앞에 쓰러진 이름 모르는 풀잎이 되고

광포한 노인처럼 허물어진 콜로세움

검투사 잘린 팔다리에 흐르던 피인 양

붉디붉은 석양이 떨어진다

모두가 아픈데 아무도 상처를 찾지 못했다

20유로 싸구려 게스트하우스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에 누워

테베레강을 배회하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싶지 않다.

 

-시집 『출생의 비밀』에서

 

 


 

 

홍성식 시인 / 아버지꽃

 

아이는 울며 돌아왔다

다그치는 나에게 학교 안 동백나무가 베어졌다는

의외의 대답

망연자실, 묵묵부답

먼 진원지에서 서러움이 쾌종시계처럼

똑딱거렸다

아.버.지

눈썹에 이슬 맺히는

자욱했던 물안개길

불 맞아 웅크린 짐승의 눈빛으로

선홍색 동백은 점점이 반짝였다

눈물 덜 마른 얼굴로 잠든

꽃 그림의 셔츠만 찾는

기르는 고양이와도 얘기를 나누는

식물 같은 아이

나의 아이

세상 젤 서러운 꽃이라던

잠시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시샘하듯 목을 꺾는 생명 같은

어린 목숨 같은 꽃이라던 동백

아버지는 흩어진 생명

목숨의 조각들로 목걸이 안들어

날 무등 태웠었다

아이의 꿈속에서 나무는 살아날까

평화로운 잠으로 나도 가고 싶건만

다시 아기가 된 아버지의 응석에

모조청자는 푸른 비명으로 깨어지고

아버지

당신 닮은 저 아이는,

저 아이의 아버지인

나는

 

 


 

 

홍성식 시인 / 봄비

- 서서

 

봄비가 내려 생명력이 차오른다

봄비가 내려 새싹이 자란다

봄비가 내려 꽃들이 회복한다

봄비가 내려 사람들이 분주하다

봄비가 내려 시원해진 공기를 마신다

봄비가 내려 구름이 모인다

봄비가 내려 맑은날이 기다려진다

봄비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쓴다

 

 


 

 

홍성식 시인 / 천변 풍경

 

 집이 없는 비둘기는 자정이 넘어도 냇가를 떠나지 못했다. 비둘기 닮은 아이들 서넛, 자식을 버린 아버지를 욕하며 싸구려 술에 취해가고, 주황빛 휘황한 가로등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위로가 사라진 세상, 가난한 여인은 서로를 연민하기엔 지나치게 야위었다. 그녀 무릎을 올린 그의 손은 이미 식어 차갑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자전거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나. 저토록 아픈 고성방가는 누구의 죄를 묻는 것인지. 잠이 사라진 여름밤, 오층 창가에 서서 쓸쓸한 바깥 지켜보는 나를 얼룩진 달이 내려다보고. 물소리마저 숨을 죽인다.

 

 


 

 

홍성식 시인 /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하이힐이 또각이며 공명했다

그녀가 올 시간이다

숱 많은 머리칼은 소나기에 젖고

덧바른 마스카라가 그늘을 만들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불협화음

잘 익은 자몽처럼 가슴이 흔들렸다

어째서 황금빛 염색을 한 걸까

훔쳐본 가방엔 미니애폴리스행 항공권

묻지 않으니 답하지 않는 시간

새벽은 언제나처럼 빨리 왔다

끌리는 보라색 벨벳 드레스 자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왼편으로 휜 여자

거기는 춥다고 하는데

모조 여우 털목도리를 선물해야 할까

 

-시집 <출생의 비밀>에서

 

 


 

홍성식 시인

1971년 부산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문예지 《시경》을 통해 등단. 시집 『아버지꽃』. 아시아-유럽 여행기 『처음 흔들렸다』.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