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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시인 / 못다 한 사랑 노래 -나타샤가 되어 백석을 그리워함
그대여, 강원도 산골 '나타샤와 흰 당나귀' 펜션에 들어 눈 감옥에 갇힌 몸입니다.
깃대봉 쓸며 오는 칼바람이 혁명처럼 우는 밤, 세상의 나타샤는 많지만 함흥기생 나타샤가 되려 합니다.
언 땅 딛고 일어선 매화나무 가지마다 피어 난 꽃을 보며, 분단의 벽쯤은 가랑잎 바람에 실려 못 넘을 길도 아닌데, 꿈으로나 가능합니다.
꿈길은 제 마음을 저보다도 잘 알아서 붉은 상사화 무더기로 피어, 그대에게 드릴 꽃다발을 엮습니다.
그대여, 예전에는 눈나라가 이렇게 감옥인 줄 몰랐어요. 눈 나라가 큰 감옥이라면 제 가슴은 사랑의 감옥, 운명처럼 만난 그 저녁이 오랏줄 묶었습니다.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의 나타샤는 불꽃 같은 사랑에 감전되어 어쩌자고 그대만을 향하여 줄달음치는지, 독수공방 사랑의 감옥을 짓고 북녘하늘 바라봅니다.
정미소 시인 / 마리아의 외출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상을 본다
성모님! 그렇게 사철 아기만 안고 계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외출도 좀 하세요 미사보와 묵주는 저에게 맡겨 놓으세요 아기도 돌봐 드릴게요
핸드백에서 랑콤NO23립스틱을 꺼내어 성모의 입술에 바른다 흙먼지 낀 손톱에는 핑크빛 네일아트, 헤어컬은 클라라슈만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패션은 요즘 유행하는 하의실종 패션, 핸드백은? 그냥 제 것을 들고 다녀오세요
성모마리아가 핸드백을 어깨에 걸고 성당 밖 사람들이 물결치는 거리를 바라본다 성모의 품에서 아기를 떼어놓으려고 할 때 아기가 운다 몸을 뒤로 젖히며 발버둥 친다 성모가 우는 아기를 꼭 끌어안는다
첫 돌 무렵의 내 앨범 속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듯 성모의 어깨를 주무른다.
정미소 시인 / 백제유물관에서
도자기 석 점이 눈길을 끈다 아가리 터진 인화무늬 토기항아리입 곧은 백자주전자목 긴 꼰무늬 분청사기
여자 셋이 모여앉아 수다를 떤다
말할 때마다 입이 비뚤어지는 부여댁 사비성 만 수라간에서 아가리 함부로 놀리다가 혼쭐이 났단다
피부가 뽀얀 태자궁 나인 임금님 수청들다 요절났단다
목선이 고운 공주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잘난 체하다가 그만 도굴 밀매업자의 눈에 들어 현 해탄을 넘었단다
빙그레 웃고 있는 연꽃무늬 수막새가 세 여자의 귀를 잡아당긴다
삶이 지옥같다지만 그 삶도 찰나라고 한다
-시집 <구상 나무 광배>에서
정미소 시인 / 사북탄광의 눈
3월에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눈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었다
지하막장 매몰된 광부들의 시신
아아, 마흔 다섯 살의 아버지!
봄눈 오는 날이면 눈에 젖은 아버지, 눈새가 되어 눈보라 사이로 훨훨 날아다닌다.
정미소 시인 / 小笑園소소원에서 온 편지 -유수화 시인에게
봄부터 여름까지 길을 내고 나무를 심었네요. 오두막도 지었네요.
초대받은 걸음이 모닥불 가에 앉아서 별을 구워요. 알밤도 익혀요.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때마침 산부엉이가 한 말씀하시네요.
시인의 정원에서 노을 밴 밤송이들 늦가을 숲이 되어 가슴 비우는 소리 들립니다.
저기, 달빛 받은 시인나무가 있네요. 석달 전, 별나라로 이사한 구름과자의 시인이 별똥별 타고 와서 합석이군요.
시가 목마른 날에는 거목의 등에 기대어 눈인사 한다고요.
별이 시처럼 쏟아지는 소소원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밤같은 시간이 전갈자리를 베고 누워 오두막의 편지를 읽고 또 읽네요.
정미소 시인 / 저울꽃
두타산 중턱의 오래된 암자에는 어머니의 무릎관절이 놓아버린 꽃이 인편에 실려 이름표를 달고 자라고 있다
하늘문 계단을 오르는 아찔한 등 떠밀며 꽃을 보고 오너라 신도증 속에서 꺼내주시는 꽃번호가 땀에 젖어 꾀죄죄하다
법당 안 만개한 꽃밭을 두리번거리며 무릎걸음으로 연잎을 헤치고 탱화의 골짜기를 넘느라 목덜미가 당긴다
가난한 어머니가 사시사철 손금 닳도록 빌어도 모자란 기도가 신중단 부처님 곁에서 일가를 이루어 소원성취 촛불에 피고 있다
용돈을 저울질한 손이 부끄럽다.
정미소 시인 / 벼락의 꼬리를 잡다
어머니는 저의 단풍물 들인 고슴도치 헤어스타일 숏커트가 마음에 안 드신대요 새로 산 핫 팬츠를 속옷이냐고 물어요 비도 안 오는데 웬 장화냐고요 요샌 여름에도 부츠 신잖았요 벗어 둔 부츠 속에서 생쥐가 놀면 어때요 찍찍, 발가락을 꼼지락 뒷꿈치를 들썩이며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어요 밥상 머리에서 어머니의 불벼락이 떨어졌어요 저도 벼락의 꼬리를 잡았어요 제가 생신 선물로 사드린 스웨터가 싸구려는 아닌지 돋보기로 상표를 훑어보셨잖아요 제 남자친구의 콧구멍이 크다고 낭비벽 험담을 하셨지요 어머니 닮은 얇은 입술이 싫어 수술한 건데 돈이 썩어서 굼벵이 이불이 되다니요 저도 어머니가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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