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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옥 시인 / 종이 인형
까끌까끌한 새 슈트에서 풍기는 시너 내음 머리카락은 조금 더 부풀려 바짓단은 조이고 전투화에 별 가루 한 줌 나의 영웅들은 기댈 벽이 필요하다
벽에 뚫린 못 자국을 오래 들여다보듯 종이는 앞면 뒷면 뒷면 앞면 천연색으로 표정을 짓고 써걱써걱 무쇠가위가 전진한다
오늘의 룰은 동틀녘의 시가전 나의 영웅들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내민다 위장크림도 수류탄도 대검도 두려움도 증오도 모두 모두 종잇장
각을 잡아 접은 면을 따라 길은 내면서 무쇠가위는 다음 스테이지를 향해 전진한다
팔락이며 닳아가는 몸뚱이 하나쯤이야 가뿐히 안아 올릴 가윗날을 믿어 미처 그려 넣지 않는 눈동자 가득 어둠이 들어 있어, 가라앉았다 떠오르며 스스로 잠들기 위해 자장가를 부르는 나날
써걱써걱 무쇠가위가 전진한다 바람에 떠밀려 팔락이는 순간에도 젖어 곤죽이 되어 이름마저 녹아 사라진다 해도 종이는 앞면 뒷면 뒷면 앞면
나의 영웅들은 기댈 벽이 필요해 절취선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서 어두워가는 종이 벽에 얼굴을 그려 넣는다
신동옥 시인 / 괴목
달빛 속에 기다란 매듭처럼 엉킨 길 끄트머리
기름때 묵은 침목 아래 아이를 묻는다는 어느 먼 도시의 이름이 새겨진 열차 한 량
굽고 파인 모퉁이 하나 없는 길을 달렸겠다 먼지 한 점 내려앉는 법 없이
입술을 일자로 앙다문 역무원이 전하는 다음 행선지는 응…… 응……
고개 숙이지 않고 젖지 않고 강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법은 지금 여기를 버려두고 떠나는 것
버찌 향 가득 밴 기나긴 터널을 덜컹거리며
자줏빛 꽃 이파리 하늘거리는 달빛 아래
누군가 돌아올 것만 같은 밤 이상한 꽃이 피어나는 밤이다
버찌는 작은 심장을 닮았다.
신동옥 시인 / 권정생 할아버지의 구름 봉투
봄이면 구름이 멎는다 겨울꽃 두어 송이 심어둔 화분 가에 멎는다 골목 끝에는 누가 사나 억센 손아귀 서글서글한 눈매에 비밀스럽고도 따분한 시간을 알아낸 아이 하나 손톱에 때가 끼는 줄도 모르고 배꼽을 쓸어내리며 긴 하품으로 헤집어놓은 도랑 아까시나무 지나 학교 종소리 강아지 동무 삼아 건넌다 종아리에 물비늘이 돋는 줄도 모르고
*
누군가 돌아올 것만 같은 저녁나절이다 날빛에 바랜 초록 잡풀이 우거진 마당으로 처마는 낮게 기울었다 반나마 허물어진 담벼락 탱자나무 울타리 벌어진 가시 틈으로 보인다 자줏빛 아궁이 버려둔 돌절구에 고인 낙숫물에 흔들리는 댓잎처럼 비뚜로 걸어둔 녹슨 거울 속에 달이 뜨면 양은상에 동치미 감자를 쪄 올린 함지박 위로 진득하게 떠오르는 별 무더기
*
움트는 새잎 끄트머리 연둣빛 바람 불어 들창에 창호지 갈아입히는 한나절 오래 묵은 일기를 꺼내 바람도 쐤겠다 식어가는 댓돌에 엉덩이 깔고 앉아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보면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르고 한 시절 건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봄눈 내려 마당을 덮고 사위는 조용한데 마당귀 돌 틈에도 두엄더미 삭은 물에도 새싹 돋는 소리
*
수챗구멍에 구정물 흐르듯 쉼 없이 뛰는 작은 심장 소리였다 무논 개흙에 앉은 살얼음 그마저 녹고 나면 코뚜레 새로 해 얹힌 소가 샛강을 건너겠다 웃으며 고랑을 내고 울며 이랑을 갈겠다 헝클어진 전깃줄 넘어가는 하늘 아래 바랜 봉투 같은 구름이 한 장 구름장을 줴뜯으며 듣는 마른 우레에도 밤 깊으면 뉘 집 자식인지도 잊어먹고 긴 잠이 들었다
신동옥 시인 / 소록도
여남은 날 미리 써둔 일기장 비워둔 날씨 칸으로는 약속이나 한 듯 빗줄기가 들이치는 여름 나절, 서울로 전학 간 친구가 뽀얀 얼굴로 다녀가면 발길을 놓친 그림자처럼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나란히 앉은 구름 사이로 번지는 노을을 가르는 햇발이나 새며 한 뼘씩 어두워졌다.
그러는 어느 사이에도 생애 첫 바다가 코앞인 그날이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면사무소에 나갔다 과역터미널 지나 녹동항까지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작은 여객선을 내려섰다. 저만치 무연한 언덕 위로 나란히 젊은 어머니 아버지 버려진 운동장 지나 통곡의 벽 지나 소록성당 종루를 돌아가고
여동생 둘 걸음마를 갓 시작한 막냇동생 초록색 돌멩이가 듬성듬성한 몽돌해변이었다, 인적 없이 빽빽한 해송 틈으로 시리고 습한 바람이 불어가던, 크레용으로 미리 그려놓은 파도 갈피로 '구름 조금 소나기'에 자디잔 물살 낯설어서 더욱 선명한 감촉으로 종아리를 적시다 사라지고 적시다 사라졌다.
-신동옥 시집, <앙코르>(아시아, 2022) 中.
신동옥 시인 / 언플러그드 -4. 카피와 피처링
6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해안가 돌무더기 위에 무대가 꾸려지고 누군가 손가락을 펼쳐 공중으로 한 바퀴 돌리며 원, 투, 쓰리, 포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연주를 계속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리프를 이어갔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무언가가 우리로 하여금 무대를 계속 살게 했기 때문에
살아온 것일 뿐이라고? 그 모든 코다와 다코다를 꾸미고 꾸며서 더는 꾸밀 데가 없는 상태까지 데려가서 거기 긴 호흡의 쉼표를 찍어두고
말 그대로 삶 주변이 찬란한 빛에 완전히 용해되어 버릴 때까지 달려왔다고? 베끼기와 창조를 가르는 건 이름값이다 이름을 가져라
프로모터는 말했다, 완벽한 이름이란 충동이나 리듬과 같은 것 그것은 언젠가 자신의 생애를 넘어서는 영역까지 지도를 확장할 것이다
무성히 우거진 남방계 수풀 속으로 이름 없는 밴드의 연주가 스며들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지 못하는 이름 없는 연주가 풀리는 물안개 너머
한 무리의 술꾼들이 다가왔고 이내 왁자한 대화들이 밴드를 에워쌌다 음악이 너무 고요해서 속삭이는 대화조차 열정 어린 고백처럼 들리고 음악이 너무 고요해서
-계간 《리토피아》 2021년 겨울호
신동옥 시인 / 왈츠
증오, 내게로
어느 죽은 자의 머리카락이 너를 친친 어느 죽은 자의 머리카락이 너를 하늘 너머로 실어갔다
머뭇머뭇 다가서며 스멀스멀 서로를 말미암는 악다구니며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멈칫멈칫 조금씩 스며드는 변명이
단 한 발짝의 무용도 안무하지 않았다*
증오, 내게로
몸부림마다 묻어둔 내밀한 문법이여 여태 우릴 이력한 눈먼 믿음의 무릎이여
곡은 무용곡-모든 음악은 무용곡이다**
*제롬 벨(Jerome Bel). **김수영, [반달]에서.
신동옥 시인 / 프롤레타리아의 봄밤
호주머니 안쪽에는 지난겨울 마지막으로 쏟아진 눈송이 한 줌 어디든 목을 축이고 추위를 피할 방은 있겠지 여기며 움켜쥔 손아귀 사이로 흘러내린 눈석임물에 바지춤이 젖기 전까지
걷다가 멈출 때면 가죽 장화를 벗어 안고 뒤축을 녹였네 폐허 아니면 무덤 그것도 아니면 무너진 담벼락 그 너머로 피어나는 연기 한 가닥에도 숨 막힐 듯 설레며 달려온 길
마치 해와 달을 이어주려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눈썹달처럼 향기로운 꽃은 빨리 지더군 겨우내 피고 지는 꽃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누가 밤새도록 향기와 악취를 가려 노래할 수 있을까
혁명이 끝나고 내란이 오거나 내란이 끝나고 혁명이 시작되거나 어쨌건 그날은 마치 멸종한 동물을 싣고 온 유랑극단이 떠난 가설극장 같았어 부서진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이슬 젖은 깃발을 내리자
봄은 오고 얼음으로 다져진 광장에 다시 풀이 돋아나네 이제 다시 이마에 재를 바르고 열을 맞추어 걷는 밤 무개화차에 차곡차곡 포개지는 밤 술잔에 가라앉은 돌멩이처럼
갈라진 등짝으로는 달빛을 가닥가닥 헤아리며 잠들게 어쨌건 기차가 달려가는 길 이편으로는 풀꽃이 자랄 땅 저편으로는 발아래 다져질 땅 그사이로는 금세 흙탕물 웅덩이가 가로놓이겠지
채 가시지 않은 가락에 콧등이 간지러운데 그날의 노래가 기억나지 않는군 덜컹거리며 계속되는 꿈속으로 순한 비가 들이치는 밤 이봐 아껴둔 초가 있으면 불을 밝혀줘 그림자가 아우성치며 일어나 바람을 막아줄 테니
버드나무 가지가지 손목을 휘저으며 눈동자를 씻어주게 하릴없이 손꼽아 헤아린 꿈결마저 앗아가게 기차는 달리고 그곳이 어디건 남은 초를 밝히고 없는 방문을 찾아 두드릴 손등이 여기 남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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