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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희정 시인 / 유령회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4.
강희정 시인 / 유령회사

강희정 시인 / 유령회사

 

 

굶주려 본 사람은 사소한 물음에도 귀하게

반응할줄 안다

 

황금이 생기면 절반을 나눠줄게

아무렇게나 주사위를 던져도 원하는 것이면 다 이루어져

말하는 너의

연한 볼에 선홍색 가는 실핏줄이 선명하다

 

강단에 올라선 너는 우두머리인 듯 뜨겁게 변한다

 

일 층부터 사 층까지 조각처럼 의자에 앉아

알이 부화하기만을 기다리는 유령들

우정을 증명하기 위해선

소리 없이 그들처럼 유령이 되어야 하는 일

 

알들은 서서히 물건값으로 변해가는 중이었고

 

심장을 홀리듯

두려운 존재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가진 게 없으면 쉽게

마음속 의심이 싹트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단단한 유리에도 성큼 실금은 자라나고

깨진 유리창처럼 우정도 쉽게 바스러진다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이 되어가는

너의 마지막 음성

 

은행 빛에 시달려 술김에 저수지 물속에 들어간 남자

그가 선물한 다이아 반지가 전당포에 붙잡혀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네

 

알에서 부화한 새를 찾느라 도시의 유리문을 두드리는

 

얼굴 없는 이의

낯선 목소리가 잠든 액정을 하얗게 흔들어 깨운다

 

-계간 『시와산문』 (2024년 겨울호)

 

 


 

 

강희정 시인 / 새벽의 살결

 

 

걸음을 디딜 때마다

빙판길 트럭처럼 제자리 중인 그녀

 

이삿짐을 지켜보는 한기가

집 한 채만이 전부였을 몸에

싸락눈 같은 새벽을 안겨준다

 

가만 차오르는 미명

 

그녀를 업은 젊은이가

요양원 문을 밀고 들어간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순한

흰 살결의 침대가

오랜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다

 

물컹 민달팽이 같은 그녀를

누이고

되돌아갈 길은 아득해

 

눈을 감아도

물빛으로 가라앉은 새벽이

네 귀퉁이에서 왈칵왈칵 차오른다

 

뭍으로 걸어 나온 안개가

몸피만큼의 정적에 오래 서 있다

 

-『모던포엠」 2022년 4월호

 

 


 

 

강희정 시인 / 눈에 물이 흐른다

 

생각이 몸에 말을 걸면

불쑥 떠오르는 이미지

몇 걸음 뒤 다시 생각을 멈춥니다

헐렁한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비 오듯 햇살이 떨어지면

태어나 처음 느껴본 따스함을 대하듯

오늘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하늘 저 망망함 중에도 잿빛 구름은 살고

생활은 어쩌면 안개와도 같아

한 걸음 다가가면 열 걸음 물러서고

움켜쥐려 하면 내게서 사라집니다

흐르는 것은 모두 한곳으로 모인다는

믿음이 절실해지는 이쯤이면

나는 물이 되어 곧잘 흘러갑니다

마음 몇 개 바닷가에 떼어놓으니

남아 있는 마음마저 내어놓으라고

거칠게 쏘아붙이는 바람

눈시울이 포말 되어 구두 곁을 적십니다

불안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장애였을까요

농담처럼 두해살이 꽃이 터지고

이른 저녁 품에 든 새 한 마리 날아갑니다

 

 


 

 

강희정 시인 / 조용한 시간

 

 

 떨어진 꽃송이가 붉다 달포 해포가 지나서도 붉다 고양이 발톱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꽃잎을 할퀴고 지나간다 어디에서 불어온 바람일까 당신은 검은 가방 안 검은 핸드폰이 부서졌다고 했다 하얀 가방 안 하얀 핸드폰은 괜찮다고 알려주었다 당신의 이름이 종이 위에 폭설처럼 내려앉으면 유빙이 깨지는 것도 종탑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만 같았다 차갑게 굳어가는 시간 앞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은 눈초리 곁에 본래의 슬픔보다 더 자잘한 눈물로 맺혔다

 

 당신의 호흡이 정지한 동안에도 바람의 속살은 울새를 달랬고 층층나무의 우듬지를 키웠다 누구에게나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거라며 긴 꿈속에 나타나 뭉툭한 손으로 하늘을 잡아당겨 일곱 개의 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느 별에 몸담고 있을 건지 알려주지 않고 떠나갔다 눈을 뜨면 발자국이 사라진다는 것을 눈도 귀도 사라진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붉은 꽃이 피었다가 진다 애초의 슬픔일 바람은 꽃잎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강희정 시인 / 슈퍼 블러드 MOON

 

 

 옆집 사는 미경이가 독사에게 물렸다 그는 단숨에 테세우스가 되어 둥근 브라운관 밖으로 빛처럼 튀어나와 괴물을 물리치고 앞니로 살갗을 찢어 피를 빨아 휙휙 내뱉었다 곁에는 그 애 엄마 아빠도 있었는데

 노을이 마을을 물들일 때 트럭 문이

 열렸고 키가 큰 미경이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가버렸다

 아테네의 왕이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신화를 내게 들려주던 그는

 이불을 돌돌 말고선 번데기가 되어갔다

 남쪽 사는 매미가 전국에 날아들어 지붕을 벗기고 벼 이삭을 넘어뜨렸다 그의 아내 열 손가락은 속수무책 비바람 뿌리치고 탈출한 가축들도 집 나간 지 얼마 안 돼 큰 물소리에 갇히고 말았으나 그의 우화는 오지 않았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는 마른 영웅 그의 한쪽 폐는 녹았고 다른 쪽도 곧 기능을 상실할 것 같다고 의사가 말했다 병원 밖 축축한 밤하늘 독오른 핏물이 달항아리에 흉터처럼 고여 있다 뒤늦게 부화한 늦매미가 붉은 물기를 털어내고 날개를 말리고 있다

 

 


 

 

강희정 시인 / 짐승

 그가 멸치 한 줌을 쥐고 있다 턱시도

 코숏이 꼬리를 흔든다

 주먹이 휘두른 폭력의 공기에

 붉은 속살이 털을 밀어낸다

 고양이를 지극히 싫어하는 부인이

 애완견과 산책을 한다

 목줄이 느슨해진 틈을 노려 시고르자브종은

 자주 하얀 이를 드러낸다

 입에 거품이 생긴다

 짐승은 돌보는 게 아니에요 결국엔 해코지할 거예요 그녀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그를 보면서 개의 목줄을 푼다 인간과 살다가 버려진 겁니다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고양이는 제 하인 대하듯 아쉬우면 애교를 부리다가도 어느새 쌀쌀맞게 돌아선다니까요 개가 고양이 뒤를 쫒는다 고양이가 사람을 물고 공격했다는 소식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소녀의 종아리가 피를 쏟아낸다

 혀에 피 묻은 개를 품에

 안은 부인의 얼굴이 누렇다 그리고

 다친 소녀를 향해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른다

 

 


 

 

강희정 시인 / 슬픔이라는 풍경

 

 

철 지난 꽃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어릴 적 듣던 이야기에 숨어든다

 

사라지는 것은 모두 이별인 거라며

먼저 떠난 솔비가

대문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본다

 

빨간 우편함에 휘파람 불어 넣고

유령처럼

빨랫줄 아래 졸고 있는 꽃무늬 치마 흔들어 깨운다

 

어디 갔다 왔니

 

배냇저고리 땅에 묻은 손

흙 마르지 않아

 

사흘을 못 넘겼다는데

엄마는 쌀을 씻고 미역을 불리고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울다가 손을 닦고 다시 섧고

 

만삭인 솔비가 꼬리를 늘어뜨리고 끙끙거리며

방문 앞을 맴돈다

 

사람도 짐승도 핏덩이 앞에 서면

어찌하여 눈물이 고이는지

 

어떤 우울은 너무 무거워

나무도 견디지 못하고 이파리를 모두 떨구어낸다

 

맨발로 오솔길 오르면 눈까지 빨개진다

 

은갈색 억새풀이 샤륵 머리칼을 푼다

 

 


 

강희정 시인

1974년 전남 화순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 202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22년 계간 《시산맥》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