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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방수진 시인 / 어떤 불시착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3.
방수진 시인 / 어떤 불시착

방수진 시인 / 어떤 불시착

 

 

머리보다 큰 배를 안고

지하철 안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여자가 있다

뒤뚱뒤뚱 걷는 뒷모습 사이로

세상이 흔들렸다 갸우뚱거렸고

둥그런 배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같은 겨울은 오지 않을 거야

같은 오늘도 다신 없을 거야

봄이 오면 내 손등 위로

온갖 풀들이 자라날 거야

너는 그 풀을 뜯어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누구도 만들지 않은 행성으로 돌아가

 

여자가 품은 것은 가속도 품은 우주다

 

그녀가 태어나 이곳에 불시착하기 전까지

여자가 차곡차곡 쌓아 왔던 한 생애다

발걸음 소리 웃음소리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가장 여리고 가벼운 것들만이 잠자고 있는

순정한 무덤의표지판

 

여자는 자신이 떨어졌던 낯선 별의 속도로 울고 있다

최대한 웅크려 심장에 배를 대고

어떤 기록도 거부하며 추락하고 있다

굴러가는 볼링공처럼

뒹굴뒹굴 두 생애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시집 『한때 구름이었다』(문학수첩, 2019)

 

 


 

 

방수진 시인 / 그곳의 풍경

 

 

우리는 문득

우리 안에 흐르는 것이 궁금해

서로의 볼에 자신의 볼을 갖다 대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잠을 빼앗고 감각을 흔들고

죄를 움켜쥐게 만들었던

우리 안의 붉은 바람을 기억하면서

 

서로에게 가장 가깝지만

자신에게 영원히 낯선 면을 맞대고

도망치려는 두 체온을 포개었다

 

서로의 어깨를 겹치고

출렁이는 볼을 맞대자

밖으로만 웅크리고 있었던

선의 척추가 서서히 퍼졌다

붉은 바람이 누워있는 풀을 깨우며

밤새 볼을 넘나들었다

 

그해 겨울

우리는 우리 안에 부는 바람이 궁금해

서로의 벽에 자신의 벽을 갖다 대었다

 

나의 벽이 너의 벽을 삼키고

너의 벽이 나의 벽을 삼키고

서로를 삼킨 벽이

우리의 벽이 되고 있었다

 

맞잡은 두 손에

뒤통수가 녹아내리는 줄도 모르고

 

포개어진 두 어깨 사이로

벽이 무너져 내리는 줄도 모르고

 

우리가 우리로

아득해지는 것을 모르고

 

섞일수록 명료해진다고 믿었던 날들

너무 가까워 오히려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멋대로 뱉은 말들이 길을 잃는

 

 


 

 

방수진 시인 / 마지막 12분간간의 대화

 

 

버스 뒷좌석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새벽, 버스 창문에는 일찍 도착한 아침들이

그림 몇 개를 그려놓고 간다

신호 몇 개가 동시에 걸리는 때면

사람들 손에 들려 있는 이력서며 장바구니며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까지

속옷에 찌든 때같이 소소한 것들을

일간지 삼아 읽어보기도 하지만

가끔은, 달려온 시간만큼 정차하던 버스를 떠올린다

한여름날, 갑자기 툭 떨어지는 단추처럼

현관으로 굴러들어온 그는

편도만 끊어 왔노라 했다

한쪽 귀퉁이 헐어 해진 옷도 벗고

바람에게 목덜미도 맡기고 왔다 했다

겨울, 창문에 낀 성에를 닦으면서

기한 지나버린 어음같이 희희덕거리는 사내를

어떤 이는 엔진에 문제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기름이 다 떨어졌다고 하였지만

그의 아내, 꿈쩍 않는 그의 입가에 밥풀만 떼어냈지

버스가 멈출 때마다

약속한 듯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동공이 창문 바깥으로 얼어붙은 날이면

좀처럼 정지선을 넘지 못하고

이제 막 맞은편 차편을 끊은 사람들,

맨 뒤 좌석에서 한 번쯤 이렇게

출발하지 않는 버스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방수진 시인 / 너의 장례​

​네가 내 안에서 파닥거리길 포기했을 때

나는 불현 듯 얼굴을 잃어버렸다

눈코입 사라진 채 한참을 웃었지

지루하고 나약한 봄날의 삐에로처럼,

믿음이란 건 어쩌면 우스워

오래된 흑백 TV처럼 잔인하지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나올 듯 보이지 않는

기대는 화면을 쉴 수 없게 하거든

거봐,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 너무 아름다운 절망들

마음이 죽으면

어디다 문어야 할까

밑그림 없이 시작한 채색을

멈출 수 있을까

마음을 버렸다는 건

버려진 모국어가 되었다는 건

내 울음소리를 듣고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건

나의 무늬와 당신의 무늬가 서로 간섭하며 절망하는 이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바닥에 널브러진 당신의 얼굴을 집어 내 뺨 위로 갖다 대는 것이겠지. 기억은 때때로 나에게 내 심장마저 포기하라 말하지만 난 내 두 다리를 버리고 쓴다. 과거의 나는 바보였으나 아름다운 적 있다. 당신은 바람이었으나 꽃을 피운 적 있다.​

​​

-<시사사> 2022년 봄호 중에서

 

 


 

 

방수진 시인 / 알래스카의 밤

 

 

우리는 고목나무처럼 나란히 누워

서로의 마른 살갗을 가만히

매만져 주곤 했었다 마치,

이것 말고는 기억나는 일이 없다는 듯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의 손끝에서 툭툭 떨어지는 살갗을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었다

 

들러붙은 웃음들로 벽지가 눅눅해졌다

마주한 어깨가 쉼 없이 녹아내렸다

자주 너는 등을 한껏 웅크린 채

아무리 불을 끄고 눈을 감아도

쉽사리 어두워지지 않는 밤에 대해 중얼거렸다

그럴 때면 가 본 적 없는 알래스카의 자정을 떠올린다 했었지

 

그곳에선, 한 번 감았다 뜨는 별들의 눈동자만으로도

이생의 기억이 제 온도를 찾아 퍼덕이고

눈이 쌓이는 소리를 조용히 배웅하는 마음만으로도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었지

매일 알래스카를 떠났다 돌아오는 네 발걸음이

내 심장 위를 도장 찍듯 새기던 날들,

 

하루는 네가 떠나버리고

저물지 않는 너의 밤에

커튼을 치러 들렀을 때 보았다

 

네 상처의 낱장이

둥둥 떠다니는 큰 물방울이 되어

침대를 적시고

바닥을 채우고

지구 정반대편의,

어쩌면 애초부터 나에겐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르는

너의 세계를 한없이 적시고 있는 모습을

젖을 대로 젖어 축 늘어진 감정의 테이프가

일생를 거쳐 말라가는 모습을

 

- 계간 《시인수첩》 2019년 여름호

 

 


 

 

방수진 시인 / 대기만星

 

 

달린다

내딛는 발바닥의 온도가

일억 오천살 앉은뱅이 행성의 뺨을

철썩 하고 후려칠 때까지

 

달릴 것이다

죽도록 달릴 것이다

 

-시집 한때 구름이었다. (문학수첩, 2019년 8월)

 

 


 

 

방수진 시인 / 너를 믿어 본다는 것

 

 

너를 믿어 본다는 것이

이렇게 멀리 와 버렸다

거리의 간판들이 죄다 쏟아지고

흩날리는 글자들이 서로의 몸들 더듬는 아침

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너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둔 손이

누군가의 발끝만큼 부끄러워질 때

네가 딛고 서 있는 행성의 자전축도

몇 도쯤은 기울었으리라

문턱은 낮아지고 열매는

부풀었으리라

그래도 몇 문장만으로

너를 잡아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꽃잎은 지기를 포기했는지 모른다

증오는 옷깃에서 옷깃으로

쉬지 않고 번지고

우린 얼굴 빠진 초상화처럼

한없이 무기력해졌지

하루는 시들해진 화분 속에서

당신이 버리고 간

습기를 들이마셨다

너무 단단해서 보기만 해도

깨져 버릴 것 같은 것들

슬퍼도 울지 못하는 것들이

그 안에서 소리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시집 『한때 구름이었다』(문학수첩, 2019)

 

 


 

방수진 시인

1984년 부산에서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화동사범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석사 졸업. 2008년 제8회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한때 구름이었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일간스포츠 여행레져본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