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함동수 시인 / 물의 환상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12.
함동수 시인 / 물의 환상도

함동수 시인 / 물의 환상도

 

 

빙그르 돌고 돌아 걷잡을 수 없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나가는

순환의 길을 떠납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아득하지만

물은 언제나 깊은 곳 물길 따라

낮은 곳

도로 그 자리입니다

 

세상의 낮은 곳을 채우다

넘치면 또다시 아래로

빈 곳을 찾아가는

물의 행로는 발끝마다 은혜롭습니다

 

강물에서 바닷물로

돌고 돌아가며

묵묵히 되돌아 솟아오르는 물은

주천周天*의 순환길

 

물은

그저 흐를 뿐

강바닥의 크고 작음을

탓하지 않습니다

 

흐르는 동안 줄기차게 물바퀴를 돌리는

바람신이

한시도 강물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천周天: 온 하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천체의 범위.

 

 


 

 

함동수 시인 / 공수도 4

 

 

어느 햇볕 쨍하고 내리 쬐는 하굣길

개울가에서 헛, 헛, 하는 기합소리에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니

개울 둑쌓기 공사를 하던 젊은 군인이 넓적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는

그 단단함에 도전 하는 중이다

두드려도 메쳐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푸른 돌 하나를 들고는

온 세상과 씨름을 하는 중인데

어찌나 궁금하던지, 모두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노라니, 정말

몇 번을 내리치더니 무 토막 나듯 반쪽이 툭, 갈라졌다

 

모두

무료했던 오후였을까

 

신나게 관객을 둘러 모은

한 장사의 땡볕 전설은

이제야 풀어졌으니

 

-시집 『은이(隱里)골에 숨다』, 《지혜》에서

 

 


 

 

함동수 시인 / 순두부백반

 

 

어느 여름, 아들 집에 오셨다 일찍 내려가신다고

식전 출근길에 서초동 회사 근처 식당에 들어서는데

양복 입고 앞서 들어서는 이는 본 척도 없이

허름한 여름옷 입고 뒤따라 들어서는 어머니가 수상한지

"뭐에요?" 하는 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화끈하다

머리 맞대고 순두부 백반 먹는 내내

어머니도 나처럼 뜨거운 줄도 모르고

아무 말 없이

순두부만 뚝뚝 퍼 담고 있다

 

-시집 <하루 사는 법 / 책나무출판사 2009>中

 

 


 

 

함동수 시인 / 소리쟁이

 

 

산 그림자보다 커지는 키는 어쩔 수 없어

바람의 노래가 가까워지는 건 어쩔 수 없어

저녁달을 따라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누구보다 종소리를 크게 들려주고 싶어서

가을이 되면 꽃대에서 휘파람 소리가 자라났지

머리가 마르고 바람이 불면 먼지털이개처럼

마른 몸에선 요란한 비명이 커져갔지

 

잔딧물이 말라붙는 소리일거야

개미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비명일거야

마디가 뼈를 세우고 줄기들이 붙잡아도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풀 속은 숨이 찰거야

 

내 몸에서 나는 비명은 이명(耳鳴)처럼

들리지 않는 몸부림인데

바람이 흔드는 울림을 어찌하라고

 

풀숲의 기다란 키는 어쩔 수 없어

나도 울고 싶지 않은데

바람이 흔드는 걸 어쩌라고

 

그 바람은 나는 어쩌라고

 

 


 

 

함동수 시인 / 은이(隱里)의 전설

 

 

은이(隱里)란

몸을 숨겨 지내는 동네이니

으슥한 산중이다

양지(陽地)에서 눈을 피해 산중으로 이십 여리 숨어들면

그쯤에 은이 마을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은이(隱里)에 빛 들어 개활지 되고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잡혀가

소식이 끊기는 사지(死地)로 스러져갔는데

 

성 안드레아가 떠난 지 보름 만에

절두산에서 비보가 들리니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왕조의 시퍼런 칼날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혼 찾으러 떠난 교우들이 밤으로

밤으로만 그의 주검을 메고 온 캄캄한 길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는데

 

은이(隱里)에서 미리내까지 김대건의 유체를 메고

산길을 기어올라 넘었다는 삼덕(三德)고개 길의 전설은

미리내보다 빛나는 순교의 길이 가파르게 눈부시다

 

 


 

 

함동수 시인 / 안절부절

 

 

흙을 빚어 물레를 돌리다가 문득

신이 마지막 날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구절을 생각하며

 

내 갈비뼈 하나쯤 뽑아서 흙을 빚어 콧바람을 불면

천사 같은 여인도 만들 수 있다는 호기가 생기네

 

나도 흙이었고 당신도 흙이어서

이렇게 곱게 빚어 천삼백 도로 시뻘겋게 구워

깨질까 부서질까 안절부절 살아왔는데

어쩌다 돌이라도 맞아 산산조각이 나면

깨진 파편은 천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갈 수 없이

평생 산산散散일 수밖에 없을 것이네

 

도자는 깨지면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당신은 다시 만들 수도 없으니

수천 년을 안절부절 어찌 바라만 보겠나

 

 


 

 

함동수 시인 / 집터를 세우며

 

 

집을 짓는 일은 도전이다

집을 짓기 전에 길을 먼저 낸다

집을 짓는 것인지 길을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간의 묵은 집을 들어내다 버리기를 수십여 차례 만에

사람을 품고 지내던 낡은 집이

동굴처럼 컴컴하게 비어간다

 

집을 짓는 일이란

새 길을 여는 것

옛 것과 간단치 않게 이별하는 것이니

낡은 길을 허물어야 새 길이 온다

 

길 위에 던져진 그림자 지워지고

또 다른 그림자가 세워질 때까지

검은 적막은 혁명의 시간이다

 

집을 짓는 데는 큰 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돌이 더 필요하다

어우러져 틀을 잡고 작은 공간을 채워야

길이 되는 것이다

 

이제 큰 길을 가는데 큰 돌, 작은 돌을 탓할 수 없다

작은 집 하나 짓는데, 작은 마당 하나

마음의 지평선 하나면 부러울 것이 없다

 

 


 

함동수 시인

1957년 강원 홍천 출생. 한신대학교 대학원 졸업. 2000년《문학과 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하루사는 법』 『은이골에 숨다』. 산문집 『꿈꾸는 시인』 『사람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공저, 유완희 시인 『송은 유완희의 문학세계』. 연구서 공저. 『용인600년 기념문집』이 있음. 경기문학상, 경기예술대상 수상. 2019. 제29회 용인시 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용인문화재단 비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