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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수아 시인 / 휴일의 카프리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0.
안수아 시인 / 휴일의 카프리스

안수아 시인 / 휴일의 카프리스

 

 

파가니니의 선율이 흐르는

거실 그 거실 창밖으로 내리는 눈

아른아른 눈 속으로 백석의 시 몇 편 흘려보내는

아침 그 아침 얄궂게 찾아왔지

바이올린 두세 소절 눈 위에 반짝이는 오전

 

글자들이 쪼그라들었다 다시

커졌어 편두통은

눈 속에 가라앉아 버렸나봐

폭설은 어스름을 데려오고

장거리 여행의 즉흥휴게소,

 

목도리를 두른 말라깽이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가는

정오 그 정오가 한 옥타브 낮아진

바다 그 바다보다 깊어진 한낮

어스름 속에서 해초 내음으로 번져가는

24개의 무반주 카프리스* 백일몽으로

가볍개 흔들리는 오후 네 시

 

*caprices: 광상곡

 

 


 

 

안수아 시인 / 실버공제조합

 

 

흰머리 가족이 모였다

 

엄마가 하늘로 가신 날

오십을 뺀 동안들이

묵은 인사를 한다

 

이모가 고모고 고모가 이모다

엄마가 수아고 수아가 엄마다

 

우리 가족의 말장난,

아재 개그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우스갯소리 한 바가지 풀어놓는다

 

영정사진 속 엄마도

분홍 낮달맞이꽃 웃음 지으시고

깔깔대는 가족들

 

엄마 발인하는 날

검은 머리를 공제한

흰머리들이

실버공제조합을 열었다

 

이팝나무 흰 꽃들도

장지 길을 환하게 밝힌다

 

-[월간모던포엠] 2023년 7월호 발표작

 

 


 

 

안수아 시인 / 고양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막도 아니고 푸른 바다도 아닌 당신의 주머니 속에 웅크린, 방들이 빙빙 돌아요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나의 노래는 알록달록 즐거워요 주머니에서 제멋대로 빠져 나와 춤을 추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로 어우러지다 흩어지는 아침 공기 같은 이름의 고양이, 엉킨 스텝이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 출구를 찾는

 

 인샬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넌 몰라! 주머니 속의 고양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죠 검은 망막 안의 귀여운 유령 안녕? 보르헤스도 안녕?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 광마우스는 왼쪽으로만 구부러졌어요 당신은 보았나요? 내 이마에 늘어진 생선 비린내, 마흔세 개의 계단이 헬륨 풍선처럼 콩,콩 튕겨 올랐죠

 

 인샬라! 검은 고양이

 속눈썹이 보풀거리는 아지랑이

 퍼즐조각 햇살이 살고 있어요

 사막을 횡단하는

 코끼리의 다리가 어른거려요

 재규어 가죽무늬에 씌어진 글자들

 당신은 읽어보았나요?

 그래도 난 고양일 뿐이죠

 

 


 

 

안수아 시인 / 프리즘

 

 

빛이 폭발해

산산조각이 나요

 

꽃잎을 만지지 마세요

어둠행 티켓 거울이 있어요

왼손에 빨강 핸드폰

양파링으로 떠있는 노랑 풍선

피크닉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거드름을 피워요

여름정원은 재잘거리고 있어

너털웃음이 춤을 춰요

 

피노키오의 코처럼 늘어나는

나무의 초록 구렛나룻

펼쳐진 주근깨에 돋보기를 들이대지 마세요

당신은 감염되고 있어

 

머그컵에 농담을 타먹으세요

물고기가 하품하는 파랑 모자

드럼소리는 잠들어

모퉁이 LG25시가 둥둥

끝없이 늘어나는 침대 어디에서 자를까요?

햇살이 잠수중인 검정 안경

감아올려봐요

사방에 방사된 거미줄처럼

투명한 날 깨트려줘요

별 그림자는 그대로였어

1008번째 반달이 펼치다 꺼져갔던가

 

 


 

 

안수아 시인 / 도도새는 어디로 갔을까

 

 

달콤한 크리스피 도넛을 먹어요

그림자를 앞서가거나 뒤따라가면서

낭만 없는 안락과 권태를 넘나들면서

 

어디쯤에서 앙코르를 외쳐야 할 것인가?

오일은 가득 채워져 있어

엑셀도 오른발 아래 있잖아

확신과 불안이 얼굴을 맞대고

달려가 보는 거야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너도 모르는 사이

No는 네 사전에 찾을 수 없지

 

넌 그저 소모품이야

가여운 날개로 무얼 하겠니?

세 발짝 물러서 있잖아

뒤뚱거리는 엉덩이에 폭발물을 매단 도도새야

네 다리로 걸어 다니다

뒷다리가 꼬리로 바뀐 고래가 아니잖니?

날개는 이미 그림자 파일일 뿐이야

 

왜 거들떠보지 않는 거니?

선사시대를 살았어

음흉주머니가 있는 동안

도도한 꼬리깃털을 세운 은둔자는

스스로 드러내고 만 거야

 

왜 청개구리 짓만 하는 거야, 날개는?

왜 약을 올리는 거야, 꽁지는?

 

 


 

 

안수아 시인 / 해파리

 

 

사냥이 시작되었다

 

와글와글,투명한 UFO 습격

젤리 혀가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머리도 꼬리도 없이 모자를 쓴

심해의 진하디 진한 예감이다

유감이지만, 심호흡이 필요해

낙하산이 떠오르고 있어

우리는 습격을 당하고 있는가

 

짐작할 수 없는 모자는 너무 투명해

애송이들은 발자국 없이

물거품으로 남는 잔치들

 

푸딩으로 식욕을 채울 거야

이걸 폭설이라고 불러도 될까

매일 매일 바다내음이 흘러나온다

 

그래, 이 모자로도 난 족해

이 모자 때문에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잘된 일이지

 

투명해서 불온한 기록은

게토 같은 도시를 유영하고 있다

 

풀풀 눈이 날리고 있다

우산도 없이 머플러도 없이 촉수들은

퇴색된 넥타이처럼 창백하다

 

가벼워지는 구름모자를 쓰고

고스란히 낯설어지는 너의 생존법

 

-시집 『롤러코스터를 타는 오렌지 재킷』 2021.시산맥

 

 


 

안수아 시인

1965년 전남 보성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 과정을 수료, 2007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롤러코스터를 타는 오렌지 재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