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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택 시인(군위) / 눈을 밟으면
불현듯이 눈이 내린다 아침 무렵 먼 산이 무너지더니 이제는 앞동산 뒷산이 풀풀 날린다 대추나무 끝가지에도 눈이 내리고 암소 잔등이에도 눈이 내린다 날마다 버려도 그리운 저쪽 안팎으로 눈이 내린다 갈 곳은 없어도 골목으로 나간다 골목에도 왼쪽으로 눈이 내린다 대추나무 끝가지가 하늘에 떠오른다 동네 앞 新作路 미루나무며 먼 산으로 가는 참새 같은 것 아, 아, 눈 내리는 우리 마을 하늘에 뜬다 눈을 밟으면 우리들의 발꿈치도 하늘에 뜬다
서종택 시인(군위) / 까치밥
우리집 앞마당에는 까치들이 버리고 간 늙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쓸쓸한 감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한 줄 한 줄 불어와서는 마당 한구석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햇살은 가득하게 내려오면서 감나무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남은 햇살은 감나무 그림자 가에 모여서 나와 함께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외롭고 슬픗할 때면 감나무 아래 기대 앉아서 저문 햇빛 수천 그루 노을이 되어 아득하게 떠가는 것 보았습니다. 흐르는 노을 그냥 보내기 정말 싫어서 두 손을 꼭 잡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밤이 되면은 감나무는 하늘 위로 달을 띄워서 하늬바람 가는 길 내어주지요.
사람들이 사는 곳 어두웠기에 달빛은 그만큼 밝았습니다. 세상은 달빛 속에 잠들어가고 달빛 또한 세상 속에 잠들어 갈 때, 나는 감나무 가지 끝 까치밥 몇 개 글썽이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따지 않고 남겨 두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까치밥 몇 개, 외롭고 슬픗한 지난 한 해를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간직했어요.
서종택 시인(군위) / 호루루기
우리집 은행나무 아래로 부는 바람의 어깨가 절반쯤 노랗게 물든 날이었읍니다. 그날은 학교가는 길에 휘파람을 불면서 골목길에 가득한 햇살을 가볍게 밀어제치기도 하였읍니다. 애들은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뛰어다리고 햇살 드문 드문 섞인 웃음소리는 느릅나무 그늘에 깔렸읍니다. 선생님의 긴 호루루기 소리가 우리들의 잘 차려 입은 옷자락을 스치며 길을 떠나고 그 뒤를 따라가는 엷은 발꿈치는 즐거운 생각으로 뒤덮여 어지러웠읍니다. 손에 손을 잡고 국민학교 1학년 때 부터 배운 노래들을 모두 불렀읍니다. 하마 목이 쉰 노래까지 섞어부르며 우리를 이어주는 여리대 여린 손가락에다 하늘이나 걸어놓고 먼먼 앞날같은 것을 약속했어요. 어떤 노래는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어떤 노래는 길가 플라타너스로 날아가 더러는 그 큰 잎사귀 위에 잠시 앉아 쉬기도 하였읍니다. 도회지를 벗어나자 길은 한결 싱싱해지고 풀잎으로 파랗게 반짝이는 것이 여간 아름다운게 아니었읍니다. 우리들은 더욱 애들의 운동화를 걸어 넘어뜨리고 준비해 둔 몇가지의 웃음을 재빨리 넣어주곤 하였읍니다. 그러면 넘어진 애는 눈을 가늘 게 흘기면서 살짝 토라지는 것이었지만 사과를 먹으면서 오던 다른애가 보기좋게 나동그라졌을 땐 누구보다 더 커다랗고 굴곡이 맑은 웃음을 그애의 운동화에 꽉 차게 넣어주는 것이 아니겠읍니가. 아뭏든 그렇듯이 가는 길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비록 실수라 할지라도 금방 예쁘게 포장이 되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참한 것이 되는 것이었읍니다. 이따금 머리를 들면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우리들의 귀밑머리카락을 낱낱이 적서주었고 한 이십리쯤 내어다보이는 하늘에는 호루루기 소리가 하나 둘 날아가는 것이 보였읍니다.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서종택 시인(군위) / 문천지
다가오는 데 한평생이 걸린 사랑입니까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물결입니까 못둑에 갇힌 못물처럼 제 몸 속에 갇혀 살던 어느 해의 어느 날
처음 당신 만나던 날 생각납니다 사라지기 직전의 풍경을 싣고 끝없이 계속되는 물음처럼 물결이 일어 아직 솟아오르지 못한 반투명의 산맥들 칡넝쿨도 없이 물 밑에서 솟는 줄 몰랐습니다 꽃 피울 마음 지닌 꽃망울처럼 당신 향해 고개 돌린 제 얼굴에 이목구비 솟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신 만난 그날부터 제 인생은 얼굴다운 얼굴을 가졌던가요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수많은 하늘 풍경 지나가는 못물
바람은 서로를 껴안으려 물결처럼 하나의 풍경에서 다른 풍경으로 건너갑니다
녹아서 물방울이 될 만큼 제가 당신 사랑하는 줄 당신은 물론 아시겠죠.
서종택 시인(군위) / 비올 것 같은 날
금방 비올 것 같은 날 이제 한차례 비 내리고 나면 가을이구나, 하고 나뭇잎들 풀이 죽겠죠 이 가을 당신과 함께 건너가는 제 몸에 끝없는 오솔길 새겨집니다
서종택 시인(군위) / 오리
아무도 없는 산속 조그만 연못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버들은 춤추고 갈대가 눈을 뜹니다 오리 몇 마리, 온갖 색이 뒤섞인 못물과 함께 남충모의 그림 속으로 날아갑니다 그림 밖에는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쌓는데 누군가 올 것 같은 이승의 산길은 못물 위에 말없이 얼비칩니다 이 모든 풍경을 오리는 천 년, 만 년 전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서종택 시인(군위) / 흙이나 말리면서
친구여, 쓸쓸히 한가롭게 지내던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국제정세나 증권시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한 지위를 나는 얻었다 티끌과 먼지 속에 앉고 누워서 쓰고 읽고 사랑하였으나 끝내 아무것도 버리지는 못했던 시절, 친구여 나는 말했다 모든 여자의 몸을 거슬러 올라 물결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서 칡넝쿨 얽힌 언덕을 건너 그리운 하늘가에 나는 간다고 이제 다시금 나는 말한다 방직공장 여공들의 임금이 아무리 가혹해도 수백 명의 瀆職者가 신문 전면을 다 채워도 슬퍼하거나 놀라거나 이맛살 찌푸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바쁘다 읽고 쓰고 지우고 고쳐 써서 발표하고 활자화된 시의 모습에 한없이 의지해서 이 세상 소식과 여자와 상품 선전과 韓國史를 의심하고 문 밖에서 안에서 숨어서 울고 빗발 속에 행군하는 보병들처럼 변치 않는 길과 가시덤불과 흙 밑에 묻힌 풍악을 밟고 물도 풀도 없어서 마침내 두려운 자유를 얻게 된다고 시인이 없다면 이 나라는 쓸쓸한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너는 말하지만, 친구여 어째서 나는 자유를 두려워하는가 자유를 위해 아무런 시도도 하는 일 없이 습기 많은 언덕에 올라 눈앞에 화안히 흩어지는 풀꽃이나 바라보는가 혹은 洞口 밖 빈터에서 햇볕 아래 젖은 흙이나 말리면서 앉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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