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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의행 시인 / 암자로 가는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1.
허의행 시인 / 암자로 가는 길

허의행 시인 / 암자로 가는 길

 

 

 문 열어 놓은 암자에 스님은 보이지도 않고 젊은 금빛 부처님 혼자 앉아서 무심하고 지루한 하루해를 보내신다 쟁반에 돌배 서너 알 차려놓았다 울안 뒤 숲에서 산꽃들은 피었다 지고 가을벌레들은 숨어서 운다

 

 아무 소원도 없어 마음 속 다 비웠는데 쳐다보지도 않던 잘생긴 부처님이 서성이다 돌아서는 나에게 예쁜 년아 가지 말고 암자에서 같이 살자고 마음 떠 보신다 더 자라 씨받이 할 때쯤 다시 찾아오마고 웃었다

 

 큰절에 다녀 온 늙은 스님이 무엇을 보고 돌아가는가 물었다 개울물 흐르는 물소리 듣고 무념으로 닳아버린 물속의 돌을 보고 순간 물 위에 떠올랐다 사라져 떠내려 가는 어리석은 내 모습을 돌아보며 떠나갑니다

 

 


 

 

허의행 시인 / 가장 행복했었다

 

 

개도 똥을 눌 때는

재촉하거나 때리지 않는다

산짐승도 똥을 눌 때는 총을

겨누지 않는다 하루 중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만은

행복했었다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바람도 없었다 아늑했다

조용한 곳이다 혼자뿐이다

편안하다 똥을 다 누고서도

앉아 있었다 그동안은

가장 행복했었다

 

 


 

 

허의행 시인 / 삼류시인의 삼류 시

 

 

 비웃음을 당해본 사람은 비웃음을 안다 삼류시인으로 살아야 하는 삼류시인은 삼류시인임을 잘 안다 일류시인이 태양이라면 태양빛에 빛바랜 돛대 없고 삿대 없이 하얗게 질린 낮달은 떠돌다 사라지는 삼류시인이다

 

 삼류 시를 지으면서 일류시인에 미쳐 일류시인 행세를 하는 삼류시인도 많다 무서운 시 정신을 지니고 일류시를 지으면서도 없는 존재인 듯 겸손한 일류시인도있다 삼류시인보다 일류시인이 너무 많다

 

-『시산맥』 2020-봄호

 

 


 

 

허의행 시인 / 재혼

 

 

싼 맛에 중고품 구두를 사러갔습니다

진열된 중고품에서 좋은 중고품을 고르기란 어려웠습니다

어떤 구두는 발에 끼어 답답했습니다 또 다른 것은 헐거워 허전한 기분입니다

발도 오래된 중고품이라 새 구두를 신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가죽에 주름도 별로 없고 깨끗하게 약칠을 해서 윤기도 있는

부드러운 중고품을 골랐습니다 디자인도 마음에 듭니다

사이즈가 꼭 맞을 것을 기대하면서

냄새 나는 중고품 발을 중고품 구두 속으로 쑥 집어넣어 보았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중고품 구두를 신고 걸어보았습니다

같이 걸어가야 할 길 위에 걸음도 가지런히 놓입니다

높낮이로 뛰어보고 빠르게 달려보아도 벗겨지지 않습니다

중고품 발이 중고품 구두에게 다짐했습니다

모든 중고품도 처음엔 새것이었다고!

길이 잘 들어 새것보다 더 좋다고!

 

 


 

 

허의행 시인 / 영정사진 찍으러 갑시다

 

 

읍내 스마트 사진관에서

70세 이상 노인들 영정사진을

무료로 찍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웃 집 朴노인과 崔노인은 양복을

주서 입고 구두 신고 모자 쓰고

아침부터 서둘렀습니다

 

따라 나서려는 金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가 다음에

가라고 말립니다 여름내 농사일로

까맣게 탄 몸뚱이와 바싹 마른 얼굴에

광대뼈 나오고 움푹 파인 눈이

흉업고 낯설어 무섭다고 합니다

 

불그레 혈색 좋아지고 투실투실

새살 돋아나 때깔도 좋고 빛깔 좋거든

찍으라고 합니다 살면 살수록 몰골

더 사납기 전에 찍어두어야 한다고

金노인은 로션 바르고 넥타이 매고

머리 빗고 뒤따라 갔습니다

 

 


 

 

허의행 시인 / 친구

 

 

 오랫동안 입고 살았다 색 바랜 낡은 옷이다 입으면 편안했다 버리기에는 안타깝다 습기 차 젖은 모습을 감싸주고 호흡의 가쁜 숨결도 온전히 빨아들이고 항상 따뜻했다

 

 추운 날에도 보온성이 강했다 더운 날에도 통풍이 뛰어났다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변하지 않았다 사시사철 세월 따라 오래 입어 낡았어도 행복해서 벗기 싫은 외투였다.

 

 


 

 

허의행 시인 / 조금씩 우십시오

 

 

 어머니 오늘도 우셨습니까 눈물 흘리지 못하고 눈물 없이 우신 날이 많으셨지요 남몰래 우신 날은 더 많으셨지요 괴롭지 않으셨는지요 조금씩 우십시오 우셔야 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파 야 할 날은 더 많습니다 우시고 나면 편안하십니까 울고 나도 시원하지 않으셨지요 울지 않고 사는 언제인가요 울고 사는 날이 행복했습니까?

 

 근심을 하지 않는 날은 며칠 이나 되십니까 많은 근심 하지 마시고 조금씩 근심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끈을 근심으로 삼으셨는데 근심 없으면 허전합니까 조금씩 늙어가시고 되는 대로 살자고 웃기도 하십시오 하나님은 울음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끔 혼자라도 웃으며 사십시오 억지로라도 웃으십시오 어머니 웃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문학선 / 2019. 봄호' 에서

 

 


 

허의행 시인

1935년 충북 충주 산척 출생. 1989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달래강 설화』 『꽃잠』 『0그램의 시』 『삼류시인의 삼류 시』 『시시한 순수』 등.  현재 충북작가 · 충주작가 회원. '마음을 가리키는 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