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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대경 시인 / 벽장 속의 연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1.
서대경 시인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시인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 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시인 / 거미

 

 

아이는 벽장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는 어둠 속에 웅크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성냥을 그었다.

아이의 시선 끝에서 희디흰 짐승이 옮겨갔다.

흰 짐승은 저 끝까지 걸어가 아이를 흘깃 돌아보며 소멸했다.

아이는 다시 성냥을 그었다.

희디흰 짐승이 일어섰다.

짐승의 걸음걸이의 정적 속에서 아이는 깜빡 잠이 들었다.

희디흰 짐승이 아이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그것은 늑대였다가 거대한 쥐였다가 잠시 후 하얀 거미가 되었다.

"네가 날 불러냈구나" 거미가 말했다.

흰 불꽃 속에서 아이가 눈을 떴다.

흰 불꽃이 아이 곁으로 원을 펼쳤다.

거미가 말했다

"아이야, 넌 죽을 거야. 하지만 무섭진 않단다. 모두가 하얗게 잠든단다."

아이는 불꽃 사이로 어둠에 잠긴 벽장을 바라보았다.

너와 나는 깊은 곳에서 흰빛이 되고 바람이 된단다.

아이가 거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거미는 흰빛이 되고, 꿈이 되고, 속삭임이 되고

거미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삼켰다.

아이는 눈을 떴다.

무너진 벽 너머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는 불붙은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작고 하얀 거미가 되어 아이는 벽장 밖을 바라보았다.

 

 


 

 

서대경 시인 /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1.

변두리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 위로 눈이 내린다. 좁은 도로 양옆으로 낡고 더러운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는 붉은 깃발을 내건 무당집과 세탁소, 전당포들이 어둡게 웅크려 있다. 허공엔 추위,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뻗어가는 전깃줄의 소리.

 

2.

상가건물 5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아이는 보습학원 간판에 기대어 서서 하얀 침묵으로 뒤덮인 인적 없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의 눈발을 올려다본다.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아이가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맨다.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3.

상가건물 2층 만화방 카운터 뒤에 앉은 사내가 화면이 흔들리는 소형 TV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얼굴에 만화책을 덮고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 일어나 사내를 노려본다. 만화방 안엔 사내와 나 두 사람 뿐이다. 벌써 3시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눈이 아직도 오는군. 차가 막힐 것이다. 목욕탕에 갔다가 이발소에도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나는 그녀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서둘러 외투를 걸친다. 내게서 돈을 건네받은 카운터 뒤의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소형 TV 위로 몸을 웅크린다.

 

4.

무당집 좁은 마당에 소녀가 앉아 있다. 상가건물 벽이 마당의 절반을 가려 마당 한쪽이 저녁 무렵처럼 어둑어둑하다. 잠시 구름이 열리면서 마당으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쳐든다. 그녀는 무릎 위로 깍지를 끼고 웅크린 채 눈동자에 어리는 귀신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박수 소리. 귀신들이 낡은 상가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5.

한 여인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예배실 문을 열고 서둘러 나온다. 우리 애가 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여인이 창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여인의 시선이 무당집 마당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여자 아이에게 머문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풀어지며 창밖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바라본다. 그녀는 바라보고, 그녀는 욕을 내뱉고, 다시 바라본다. 창턱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가 돌아선다. 문을 열자 열기와 신음 소리와 박수소리가 그녀의 미소 띤 얼굴 위로 일제히 밀려든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미친놈은 추위도 못 느끼나봐. 나는 생각한다.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 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깃줄의 여정을 눈으로 쫓아 가다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의 그림자와 바람의 속삭임과 불 켜진 창의 신비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8.

「안녕하세요.」전깃줄에 매달린 아이가 사내에게 인사한다.「아저씨는 이런 거 못하죠?」사내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아이를 바라본다.「너 내려와. 내 전깃줄이야.」사내는 목욕탕 옥상 옆으로 뻗어가는 전깃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신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아이가 못마땅하다.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 옥상 가장자리로 다가간다.「이 동네 전깃줄은 내 거에요.」아이가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손을 놀려 옥상에서 멀어진다.

 

「어디 한번 잡아 봐요, 바보 아저씨.」상가 건물 벽 사이 공중에 매달린 채 아이가 깔깔거린다. 하얀 눈송이가 아이의 몸 위로 내려앉는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고함을 지른다.「그럼 다음에 봐요.」아이가 손을 흔든다. 아이의 몸이 허공에 매달린 채 천천히 멀어져간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소리친다. 한 차례 돌풍이 일자 전깃줄이 일제히 윙윙거리며 사내의 벌거벗은 몸 위로 눈가루를 날린다. 사내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턴다.「안녕! 잘있어요, 바보 아저씨!」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공장 지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물거리는 잿빛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9.

깊은 밤의 거리 위로 여전히 눈이 내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있다.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선다. 불 꺼진 상가건물과 목욕탕 건물이 내다보이고, 무당집 마당의 어둠 속에 소녀와 가방을 앞으로 둘러맨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본다. 파르스름한 눈송이가 아이들의 몸 위로 반짝이고 있다.

 

 


 

 

서대경 시인 / 밝은 방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여러 개의 꿈에서 하나의 꿈으로 건너왔다 나는 천장 위를 거닌 다 바람이 킬킬거리며 창문을 흔들어댄다 천장 위로 달빛의 음영이 일렁인다 나는 이곳의 리듬이 마음에 든다 이곳은 밝고 춥다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요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이곳에선 허공의 숨소리가 들린다 알맞게 어둡고 서늘한 속삭임이 내 열린 가슴속을 드나든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는 이 존재의 굉음은 무엇일까 저 아이는 누굴까 누가 저 아이를 이 방 안에 눕혔을까 여기서는 모든 꿈이 잘 보인다 꿈의 입구를 여닫는 소리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 몸을 구부리고 달빛에 잠기는 소리 침대 안의 미로들이 우글거리는 소리 이 비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이는 누구를 기다리다 이렇게 잠이 든 걸까 그러나 나는...... 아이야, 삼 년 전에 네 아버지는 죽었단다...... 그러나 나는 ...... 그러나 나는...... 왜 아이는 깨어나지 않을까 왜 아이는 아까부터 가늘게 눈을 뜨고 있을까

 

 


 

 

서대경 시인 /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내 할머니의 영혼은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 내가 혼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노라면 그것은 쥐가 돌아다닐 때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실 할머니의 영혼은 쥐를 닮긴 했다. 사람들은 왠지 영혼이라 하면 밝거나 투명한 어떤 빛의 덩어리 같은 걸 떠홀리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영혼은 검고 앙상하고 털이 나 있다. 피터 아저씨는 그건 그냥 취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할머니가 누운 침대 밑으로 그것이 나오는 걸 나는 보았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쥐가 아니다. 더구나 할머니가 숨을 거둘 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천천히 뒤로, 얼굴의 내부로, 돌아갈 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일으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언가가 뒷걸음치는 소리, 무언가 하얀... 그것은 할머니의 내부에서 섬광처럼 하얗게 빛나다가 곧 어두워졌고, 그것은 곧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 아저씨는 말없이 시트를 끌어올려 할머니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창밖으로 서커스 공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온다. 골목을 달려 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는 탁자 위에 놓인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바라본다. 피터 아저씨는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피터 아저씨는 가끔씩 날 때리지만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아저씨는 술에 취해 하얗게 분칠한 내 얼굴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북소리가 멀어져간다. 문밖 계단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나는 문을 열어본다.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다. 어둠의 가장자리가 희게 빛난다. 그는 어제 저녁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계단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피터 아저씨? 하고 불었지만 나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두워져 가는 백야의 하늘 속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은 푸르렀다. 그것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자고 갈 거예요? 하고 물었지만 아니란 걸 알았다. 저녁의 열기가 잘디잔 물방울이 되어 계단 위를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는 이해했다. 그는 꼽추 광대였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나는 알았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한 것 처럼,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그가 내게 말했다. 내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그는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하고 속삭였다.

 

 할머니의 영혼은 비밀스러운 고독에 잠겨 홀로 돌아다닌다. 할머니는 나를 보러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방식이란 걸 안다. 나는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어둑어둑해지는 백야의 길거리를 내려다본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줄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왜 이럴까? 오늘따라 내 방은 왜 이리도 끝없이 슬퍼 보일까? 오늘밤에도 그는 광대 모자를 쓰고 눈가에 붉은 불감을 칠한 채 머드 어두운 밤거리의 축축한 열기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북을 둥둥 울리며, 안나 안나 안나 속으로 속삭이면서, 나도 눈을 감고 만나는 안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락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건들이 쓰러지는 소리, 다락방 창문이 깨지는 소리, 깨진 틈으로 백야의 열기가 밀려드는 소리, 할머니의 영혼 이 헐떡이는 소리,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

 

 


 

 

서대경 시인 / 흡혈귀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2004년 《시와세계》 등단작

 

 


 

 

서대경 시인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비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사내는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갔는지 작업복의 빈 소매가 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사내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사내는 서리가 앉은 허연 머리를 허공을 향해 한껏 치켜들고서 광인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인다 그녀는 사내가 분명히 그렇게 속삭였다고 느낀다 그녀는 여관 유리창을 통해 사내를 지켜보고 있다 한 손으로 알약통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는 잠시 망설인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인다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그녀의 야윈 손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순간 거대한 대기의 굉음이, 고철 더미가 토해내는 음산한 비명 소리가, 버석거리는 얼음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그녀의 전신을 덮친다 바람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살점을 찢어발긴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 없다 갑자기 그녀의 목구멍에서 끅끅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등에서, 그녀의 어깨 위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묘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낮게, 냉혹하게 울려퍼진다

 

 그녀의 옆방 유리창 커튼이 반쯤 열리더니 벌거벗은 젊은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내는 팔을 내밀어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 사내가 그녀에게 속삭인다 그녀는 잠들어 있다 그녀는 꿈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작업복을 입은 외팔이 사내가 속삭이고 있었어」 그녀는 말이 없다 사내는 꿈속에서 자신을 응시 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사내는 성냥을 긋는다 성냥 위로 섬광이 일어선다 「희디희다」 그녀가 속삭인다 「그래」 사내가 대답한다 「희디희다」 그녀가 다시 말한다 「서리의 길, 춤춘다」 「그래」 사내가 대답한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사내는 방 안의 어둠 속으로 풀어지는 담배연기를 바라본다 「희디희다」 그녀의 창백한 음성이 천천히 잦아든다 사내는 소용돌이치는 잿빛 대기 속으로 외길처럼 무겁게 파이는 새파란 대기의 띠를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떤다 사내가 거칠게 커튼을 닫는다 「그래」 사내가 중얼거린다 여인이 눈을 뜨고 사내를 응시한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이 침대 속으로 어둡게 파고든다

 

 


 

서대경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2004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로 김준성문학상을 수상. 옮긴 책 <등에> <창세기의 비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