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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찬 시인 / 담장과 벽
지난 가을 얼룩처럼 묻어 든 낙엽의 흔적들이 남긴 시간 발자국을 하얀 페인트로 봉함질 한채 긴 겨울을 이겨낸 위세로 넓은 어깨를 펼쳐 바람을 막고 서있다
서릿발로 어석대던 담장 및 두려움들도 당당함에 기가 죽어 촉촉한 화단처럼 온기를 끌어안아 으아리 목단 작약 철쭉 영산홍 튜울립 진달래 백합들이 제멋대로 기어 붙은 담장 앞에서 벽처럼 우매한 과거를 내려놓는다 담장과 벽 사이에서 봄과 여름 사이를 바람처럼 드나들며 연신 신발을 갈아 신는다
권혁찬 시인 / 구멍
그곳엔 증오와 갈등의 색깔은 없다 그림자가 지워버린 광채들이 횟빛으로 성성하다 온도 없는 그늘처럼 적당한 미온의 움막 작은 미움조차 밝게 흘려버릴 수 없는 미궁 같은 세상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불개미 같은 시간들을 하루에 스믈 네 도막씩 잘라먹는 시간벌레 같은 우리들
사람들..
권혁찬 시인 / 부모란 이름의 배
똑딱똑딱 기차소리 가쁜 숨을 내저으며 푸념 몇 가닥 내 뿜는다 오르잔 건가 내려서잔 건가 생각이 말을 듣지 않아 회초리를 든 비 오던 날 저녁 남은 어둠이 두렵다
안개는 걷힌다 비는 눈물이 마르면 잦아 붙기를 거듭하고 된장찌개가 끓는 동안 한 방울씩 졸아붙는 사랑 부모란 굴레의 업이 어둠보다 무거워 내려놓지 못한다 내게 부모이던 이 내가 부모이던 그들 실 하나에 꿰어진 바늘들이다 어는 하나 홀로 뚫고 나갈 수 없는 여운이 질기다
작은 푸념조차 기적처럼 날려 보낼 수 없었던 어제는 보이지 않는 내일을 위해서다 차라리 긴 뱃고동 소리 같은 외마디 사랑 뜨거운 입김처럼 구름을 만들며 바다 한 가운데를 데우는 위대한 작은 배 어머니 등판 같다 노도에도 넘어지지 않는 부모란 이름의 배 큰 배!
권혁찬 시인 / 나이테
바람 세차게 올려 불던 긴 상처의 시간들 궤적은 둥글어지고 심성이 누그러져 세상을 끌어안고 나목이 되었어도 하나씩 여물어간 주름살들을 고이 접어 사리사리 얹어놓은 세상의 때 국물 절어 붙은 묵은 일기장처럼 고집 센 추억들이 켜켜이 들러붙어 산술로 헤아리기 어려운 모질고 둥근 전설이 되었다
권혁찬 시인 / 고향이 맞데이!
뙤약볕에 말라버린 아지랑이처럼 묘연한 추억들이 향기로 맺혀있는 마을길 어귀에 선 나 여기가 고향이라 말 못하고 입이 젖었다 된장 내음 술 익는 소리에 귀가 멀어 고향냄새 어둡다 아득히 짖어대던 외딴기와집 개소리만 아직도 메아리치는 곳 틀림없다 그곳이다 엄마젖내 아버지 땀내 배인 그곳이다 소가된 송아지 또 배부른 곳 인구조사나선 강아지들이 외처손님인양 훑어보는 곳 고향이 맞다 엄마뱃속 같다 눈감고 코 막아도 물소리가 고향이다 바람도 그대로인 고향이 맞데이...
권혁찬 시인 / 호흡
호흡 이란 허공 한 조각 헐어내는 의식이다. 탯줄로 오라 된 반항들이 도려낸 하늘이 구름 아래로 임하여 한 올 시름으로 흥정이 동여매 질 때마다 매듭처럼 부르트는 꽈리 조각들을 헤아리는 것 이다. 바람의 모서리에 무서리로 흩어지는 질풍들 너덜한 이념들과 내통하는 것 이다 청량한 삶 한 모금 흔건히 흘려 넣지 못한 취기만큼의 살을 저미는 것 이다 아버지의 호흡은 암울했던 유년의 탁한 흡연이다 삶의 용서를 객혈처럼 뱉어내다가 헤진 폐 한 조각을 내려놓고서야 낙엽소리 만큼의 호흡을 완성 시켰다 호흡이란 이처럼 농익은 폐암덩어리 하나로 저울질 당한다 어느 봄날 이순 자식의 허기진 일기장 보다 더 비릿한 시간들을 수선 하여 숙성된 바람들로 날게 하는 아버지의 호흡은 나의 초록빛 흡연이다
권혁찬 시인 / 새털구름위로 오는 가을
달리는 차창을 뚫고 몇 조각 쪽빛들이 새어 든다 높이 나는 새털구름들 사이로 숨었던 태양은 아프게 몽우리 진 코스모스 옆을 달릴 때쯤 이면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는 무어라 한참을 속삭이다가 얼굴만 한 조각구름을 당겨 다시 숨기를 반복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땀내 나는 날들을 뒤로하고 장마의 끝자락을 찾아 달음질하길 몇 날 이었던가 해가 기울면 새털구름들은 흰 가운을 벗고 단풍 빛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둥글게 모여 앉는다 그렇구나! 열기가 내려앉고 코스모스 줄기위로 노을빛만 가득한 서쪽하늘을 마주하고 나서야 태양이 하던 말의 의미를 더디게 알아 챈다
가을 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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