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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혁찬 시인 / 담장과 벽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1.
권혁찬 시인 / 담장과 벽

권혁찬 시인 / 담장과 벽

 

 

지난 가을 얼룩처럼 묻어 든

낙엽의 흔적들이 남긴 시간 발자국을

하얀 페인트로 봉함질 한채

긴 겨울을 이겨낸 위세로

넓은 어깨를 펼쳐 바람을 막고 서있다

 

서릿발로 어석대던

담장 및 두려움들도 당당함에 기가 죽어

촉촉한 화단처럼 온기를 끌어안아

으아리 목단 작약 철쭉

영산홍 튜울립 진달래 백합들이

제멋대로 기어 붙은 담장 앞에서

벽처럼 우매한 과거를 내려놓는다

담장과 벽 사이에서

봄과 여름 사이를 바람처럼 드나들며

연신 신발을 갈아 신는다

 

 


 

 

권혁찬 시인 / 구멍

 

 

그곳엔

증오와 갈등의 색깔은 없다

그림자가 지워버린 광채들이

횟빛으로 성성하다

온도 없는 그늘처럼 적당한 미온의 움막

작은 미움조차 밝게 흘려버릴 수 없는

미궁 같은 세상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불개미 같은 시간들을

하루에 스믈 네 도막씩 잘라먹는

시간벌레 같은

우리들

 

사람들..

 

 


 

 

권혁찬 시인 / 부모란 이름의 배

 

 

똑딱똑딱

기차소리 가쁜 숨을 내저으며 푸념 몇 가닥 내 뿜는다

오르잔 건가

내려서잔 건가

생각이 말을 듣지 않아 회초리를 든 비 오던 날 저녁

남은 어둠이 두렵다

 

안개는 걷힌다

비는 눈물이 마르면 잦아 붙기를 거듭하고

된장찌개가 끓는 동안 한 방울씩 졸아붙는 사랑

부모란 굴레의 업이 어둠보다 무거워 내려놓지 못한다

내게 부모이던 이

내가 부모이던 그들

실 하나에 꿰어진 바늘들이다

어는 하나 홀로 뚫고 나갈 수 없는 여운이 질기다

 

작은 푸념조차 기적처럼 날려 보낼 수 없었던 어제는

보이지 않는 내일을 위해서다

차라리 긴 뱃고동 소리 같은 외마디 사랑

뜨거운 입김처럼 구름을 만들며

바다 한 가운데를 데우는 위대한 작은 배

어머니 등판 같다

노도에도 넘어지지 않는 부모란 이름의 배

큰 배!

 

 


 

 

권혁찬 시인 / 나이테

 

 

바람

세차게 올려 불던

긴 상처의 시간들

궤적은 둥글어지고

심성이 누그러져

세상을 끌어안고

나목이 되었어도

하나씩 여물어간 주름살들을

고이 접어 사리사리 얹어놓은

세상의 때 국물 절어 붙은

묵은 일기장처럼

고집 센 추억들이

켜켜이 들러붙어

산술로 헤아리기 어려운

모질고 둥근 전설이 되었다

 

 


 

 

권혁찬 시인 / 고향이 맞데이!

 

 

뙤약볕에 말라버린 아지랑이처럼 묘연한 추억들이

향기로 맺혀있는 마을길 어귀에 선 나

여기가 고향이라 말 못하고 입이 젖었다

된장 내음 술 익는 소리에 귀가 멀어 고향냄새 어둡다

아득히 짖어대던 외딴기와집 개소리만 아직도 메아리치는 곳

틀림없다

그곳이다

엄마젖내 아버지 땀내 배인

그곳이다

소가된 송아지

또 배부른 곳

인구조사나선 강아지들이

외처손님인양 훑어보는 곳

고향이 맞다

엄마뱃속 같다

눈감고 코 막아도 물소리가 고향이다

바람도 그대로인

고향이 맞데이...

 

 


 

 

권혁찬 시인 / 호흡

 

 

호흡 이란

허공 한 조각 헐어내는 의식이다.

탯줄로 오라 된 반항들이 도려낸

하늘이 구름 아래로 임하여

한 올 시름으로 흥정이 동여매 질 때마다

매듭처럼 부르트는 꽈리 조각들을 헤아리는 것 이다.

바람의 모서리에

무서리로 흩어지는 질풍들

너덜한 이념들과 내통하는 것 이다

청량한 삶 한 모금

흔건히 흘려 넣지 못한

취기만큼의 살을 저미는 것 이다

아버지의 호흡은

암울했던 유년의 탁한 흡연이다

삶의 용서를 객혈처럼 뱉어내다가

헤진 폐 한 조각을 내려놓고서야

낙엽소리 만큼의 호흡을 완성 시켰다

호흡이란 이처럼

농익은 폐암덩어리 하나로 저울질 당한다

어느 봄날

이순 자식의 허기진 일기장 보다

더 비릿한 시간들을 수선 하여

숙성된 바람들로 날게 하는

아버지의 호흡은

나의 초록빛 흡연이다

 

 


 

 

권혁찬 시인 / 새털구름위로 오는 가을

 

 

달리는 차창을 뚫고 몇 조각 쪽빛들이 새어 든다

높이 나는 새털구름들 사이로 숨었던 태양은

아프게 몽우리 진 코스모스 옆을 달릴 때쯤 이면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는 무어라 한참을 속삭이다가

얼굴만 한 조각구름을 당겨 다시 숨기를 반복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땀내 나는 날들을 뒤로하고

장마의 끝자락을 찾아 달음질하길 몇 날 이었던가

해가 기울면 새털구름들은 흰 가운을 벗고

단풍 빛 드레스로 갈아입고는 둥글게 모여 앉는다

그렇구나!

열기가 내려앉고 코스모스 줄기위로

노을빛만 가득한 서쪽하늘을 마주하고 나서야

태양이 하던 말의 의미를

더디게 알아 챈다

 

가을 이었다는...

 

 


 

권혁찬 시인

1958년 경기도 안성 출생. 국립 한경대학교 졸업. 201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의 길> <텃밭 일기>. 경기문학 공로상, 평택예총 문학공로상 수상. 계간 『시산맥』 운영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평택시문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