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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원 시인 / 늙은 개와 산책을
낡은 의자는 인내한다 첨탑 위에 반짝이는 정오의 햇살을 올려다보며 발톱을, 꼬리를 은행나무에 묶인 채 네 발로 얼어붙은 엉거주춤 개의 본질을, 가구점 의자들은 새로운 스타일로 주문이 넘쳐나고 짙어가는 그늘 아래 망각한 의자의 자세를, 멀어지는 개의 의지를 오래 반성하던 낡은 의자는 낮게 깔리는 구름에서 익숙한 비의 냄새를 맡는다 되살아나는 후각은 의자를 인도할 목줄 얽매인 그늘을 뒷발로 걷어차고 컹컹, 짖던 회로가 꿈틀거리기 시작해 코에 의지하여 더듬는다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매번 같은 냄새의 덧칠은 발목을 잡히는 일 언젠가는 소화될 낯선 냄새를 향해 쉽게 버리지 못해 질질 끌려가는 타성을 건너가자 목줄을 끊고, 신선한 풀밭으로 에둘러 멀리 달아는 구름 개, 움츠러든 목을 펴고 귀가 휘날리도록 가구 골목에서 멀어져 가는 의자
최지원 시인 / 고무의 시간
먹선이 비치는 수묵담채화 속으로 급브레이크 자국 남긴 고무
돌돌 말아 한참 꾹 쥐고 있어 본들 고무에게는 축소 해석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은 구겨질 리 없는 본성이다
사방팔방으로 쑤셔 본들 유추 해석에 휘말려들지 않아 한지 위에 찍힌 고무는 늘 긍정적이다
웅덩이 투성이 고무에게 웅덩이란 없는 법이다
가위에 잘려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므로 여전히 고무이던 고무
고무가 만난, 셀 수 없는 깃발들 시도 때도 없이 펄럭임도 고무 안으로 들어오면 눈 내린 풍경처럼 잠잠해진다
도대체 고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모든 일에 폭설처럼 태연자약한 고무
세상에 어떤 고무(鼓舞)적인 일을 만나본들 고무의 깊은 심중을 알 수 있을까
해답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늘만 먹고 살아 온, 거실 한쪽 구석 고무나무 제 몸속의 미로를 풀어놓은 채 부정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다
찢기 직전의 한지가 고무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본들 누군가 버리고 간 수묵담채화에게는 확대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지상의 모든 길을 눈이 덮었다
최지원 시인 / 붉은 수화
잎이 넓은 나무일수록 잡음에 개의치 않는 무딘 청력을 타고났다
그렇다고 나무의 귀가 아주 무딘 것은 아니다 몸 밖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안테나는 몇 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교신까지 스캔 뜬다는 사실을 나무가 남긴 나이테를 보고서야 알았다
몸 전체가 소리를 기록해 놓은 엘피판이라니
나무에게 읽혀지지 않는 소리란 없었겠다 낱낱의 사물, 우주의 섭리가 깊이 해독될수록 셀 수 없는 문을 입에 문 나무 일 년에 한 번만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마음까지 휘저어대던, 호들갑 떨던 바람의 수다에 잠시 응대해주던, 뾰족이 내민 시퍼런 말로 풋내를 풍기는 수화 타고 오르는 넝쿨의 여린 눈망울들에겐 치명적이라는 것
나무가 수도 없이 반복하던 동의어에도 귀가 어두운 나는 추락의 끝이 뿌리의 끝을 간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들이 자꾸 쏟아낸다, 붉게 익은 말
지나가는 버스 안, 그림자로 스며 든 나무들 몸속 깊숙이 붉게 읽힌 수화가 번성할 때 내 귀는 당나귀처럼 삐죽삐죽 돋아났다
최지원 시인 / 뱅크만의 달 뱅크만을 지배하는 달은 거울의 방을 가졌다
지구본에도 없는, 내가 명명한 뱅크만엔 조수간만의 차가 예측 불허였고 한 달에 한 번 잠깐 밀려오는 밀물마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한 번 빠져나간 썰물은 좀처럼 밀려올 줄 모르기에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썰물의 시간이 길어 말라가는 바닥 위로 달이 던진 음모의 그물망에서 소금기 품은 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구멍에 숨어 두근거리는 가슴 붙들어 매거나 간혹 두 눈 치켜들고 동정 살피는 뻘의 족속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울의 방 루이14세가 표독한 논리로 숨통 조여 올수록 백이숙제처럼 완고하던 좌파 망둥어들마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손 더 높이 받들어‘옳소,옳소’외칠 때 짱뚱어, 따개비 같은 여린 목숨들은 아예 두 손 치켜들고 닭장 속의 알만 낳는 폐계라도 되고 싶어졌다
루이14세와 유사한 추종의 무리들과 달의 힘으로 돌고 있는 거울의 방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야 환해 질 지상의 음모들
뱅크만 달의 음모가 더 깊어지기 전에 백이숙제를 위해 고사리 뜯다 손톱 새까매 진 내가 거울의 방 안에 갇혀 눈물 닦던 소매로 밀물의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쓱쓱 거울을 닦고 있다
최지원 시인 / 괄호안의 이야기
쪼개지 않고도 여름을 통째로 파먹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를 유리성에 유배시켜 놓고 수박 속을 파낸 숟가락 끝에서 차갑게 식어 별똥별이 되어 질 목숨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곤 했었다
디비디바비디부, 으슥한 묘지의 쐐기풀 찾으러 갔으나 여린 목숨들의 온기가 식어 버린 해질 무렵의 바다, 눈앞에서 지울 수 없었다 중심문장에 부연설명 내리고 맛깔스런 묘사만 곁들여야하는 詩 도대체 쓸 수 없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벽시계 속 추가 되어 조바심 나게 반복과 기다림 사이를 똑딱똑딱, 신선한 이야기가 아니면 금방 고개 돌리고야마는 갑(甲)들의 식성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뱅글뱅글 상모까지 돌리게 했다 한번쯤 고개라도 끄덕여 주길, 박수까지는 아니라도
식어가는 별똥별 위해 느낌표 하나 뜨겁게 찍는 일이란 괄호 밖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오물거리던 슬픔 뱉어내던 곳에서 가을, 철모르는 수박이 넝쿨을 뻗는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에게 건 마법 속에서 수박의 껍질 안쪽은 점점 비워져갔다 오목한 거기 느낌표 같은 숟가락만 남았다, 덩그러니
최지원 시인 / 함박눈 놀이터
풀리지 않는 어제로부터 겨울이 온다
검푸른 털실 뭉치는 무명의 놀이터에 폭설로 굴러 미끄럼틀 반대쪽으로 시소는 조금 더 기울어진다
허공을 떠받치느라 깊어진 편두통
어느 한쪽에 편승한다는 것은 먹구름에 귀의한 장미를 기억하는 일일까
바람의 분탕질에 한곳으로 몰려가 쌓이는 바닥의 눈 유치원 유리창이 울고 난 아이의 눈가처럼 얼룩지고
그늘을 거두어들이던 팽나무 반경에서 얼음의 가면들이 차가워진 얼굴의 상처를 덮고 있다
뛰어내리자마자 몸 굴려야 하는 함박눈의 발목에 예리한 빗금으로 파고드는 모래의 파편들
나열한다,땅바닥을 치는 빛의 뜨개질 더 이상 속지 않아야겠다고 한쪽으로 기운 시소의 반대쪽에 앉혀두는 눈사람
최지원 시인 / 청보라 나팔꽃 그늘을 베고 누워있으면 멀리서 물이랑 소리 몰고 오는 나비 한 마리 바다를 건너오느라 하얗게 젖어 있다 노랑으로부터 시작되어 보랏빛으로 갈무리 되던 계절 거울 속의 거울에 골몰하느라 한꺼번에 지나쳐 버린 걸까 숨소리마저 파르라니 떨리던 소금나비 거울에서 멀어지고 싶은 만큼 소리 없는 블랙홀로 깊어지던 거울, 거울 속의 거울로 빨려 들어가 너무 이르게 보라는 당도해버린 걸까 가슴에 고여있는 짜디짠 낸새를 털어낼수록 날개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던 소금, 파도의 씨앗으로 뿌리내려 울렁울렁 너울에 기대어 청보라 넝쿨로 뻗어가 날개를 접는 곳마다 짙푸른 통점으로 피어 파도를 타고 오르며 무너진 파도로 거울을 지우며 보라의 내부를 훤히 돌아 나올 때 노랑을 삼킨 통점의 목젖에서 태초의 빛으로 하얗게 부서지던, 금요일과 금요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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