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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시인 / 백치의 산수
현관에 놓인 신발들을 보니 이 집에 없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괜히 문밖으로 나가 노크를 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고 신발 개수를 확인한다 검은색과 푸른색 신발이 있고 흰 신발이 하나 구겨져 있다
흰 신을 신고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검은 신발로 갈아 신는다
흰 신을 신은 자는 밖에 있는데, 흰 신이 말하려다 턱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올려다본다
푸른색 신발 위엔 지난 봄의 나비가 어른거린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오니 더 먼 곳으로 나와 버린 기분이다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선회하는 나비의 기침소리
공책을 펼쳐 어제 하려 했던 말을 적어본다 아무 말도 써지지 않는다 검은 신이 뚜벅뚜벅 방으로 들어온다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신는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거나 물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거나
이 집엔 많은 신발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한다 나만 빼고 모두 살아 있구나
강정 시인 / 노래
숨을 뱉다 말고 오래 쉬다 보면 몸 안의 푸른 공기가 보여요 가끔씩 죽음이 물컹하게 씹힐 때도 있어요 술 담배를 끊으려고 마세요 오염투성이 삶을 그대로 뱉으면 전깃줄과 대화할 수도 있어요 당신이 뜯어 먹은 책들이 통째로 나무로 변해 한 호흡에 하늘까지 뻗어나갈지도 몰라요 아, 사랑에 빠지셨다구요?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고 하지 마세요 숨이 턱턱 막히고 괄약근이 딴딴해지는 건 당신의 사랑이 몸 안에서 늙은 기생충들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저 깃발처럼. 바람 없이도 저 혼자 춤추는 무국적의 백기처럼, 그럼요 그저 쉬세요. 즐거워 죽을 수 있도록
강정 시인 / 목련아 , 목련아, 목련아 -'그대'에게
자색 이파리 몇 개 휘장처럼 내려진다 밤이 오기 직전, 나는 천 개의 사랑을 깨물고 버려지고 싶구나 돌 틈으로 흐르는 내 몸을 구 누구야, 낚아다오
빛이 내 화려한 안광 속으로 녹아든다 봄이 왔다 나는 적어도 만 번쯤 내 이름을 다시 부른다 만년의 세월을 나는 이 순간 죽이고 있다 온몸이 날개인 너를 유혹하려 내 이빨들이 빨간 불씨를 터뜨린다
비에 젖어도 살아남는 내 꽃들 너의 살 속에 너의 날개들을 휘어감고, 나는 숨는다 숨겨지지 않는다 만 번의 봄이 만 번씩 나는 다시 낳고 다시 나는 만 겹의 네 이파리 속을 헤집는다
어디에도 없다 너의 드센 눈빛 까마득한 기억의 전쟁터 네 꽃잎들이 찢기며 찢어진 꽃잎들 낱낱이 내 만년 輪生의 틀 속에 숨는다 너무나 잘 숨겨지는 너 이런 고백도 너는 네게 상처라고 할까?
만년 동안 시들지 않는 이런 걸 나는 사랑이라고 했다 너는 내 혀끝에 머무르지 않는 너는 죽어 떠도는 어느 오랜 기억 위에 조용히 숨어 자란다 내 흘린 피들이 빛의 채찍에 길들여진다 오랫동안 너는 나다, 목련아
강정 시인 / 아침의 시작
어젯밤엔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그림자가 죽었다 문지방 앞에서 흘러내린 어둠엔 꽃냄새가 가득했다 달의 뒤편으로 추락하던 지구가 새로운 별을 임신했다 한가에 남아 있던 냉기가 시간의 한 틈을 조개었다 문득 별이 터지니 죽은 내얼굴이 해바라기처럼 웃었다 십년 전의 벗꽃들이 폭약처럼 터졌다 이제 나는 슬프지 않을 거야, 노래 부르며 한 아이가 문 밖으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낡고 메마른 굴렁쇠가 수평선 바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강정 시인 /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이야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어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것들은 나 이후로 사망의 시간 속에 스며들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궤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곧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강정 시인 / 안녕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 노트가 허공에 나부낀다 가을비가 뜨겁다 안녕이라는 한국어는 중성명사다 밤이 온다 낮이 왔다 적멸은 배부르고 와인잔은 오래전에 깨져버렸다 나는 나의 질긴 두통과 결혼하기로 했다 두통은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천형 여자들은 두 개의 입으로 날 유혹한다 그때마다 안녕 하고 발음한다 내 혀는 도토리묵보다 단단하지만 바위 앞에선 이만큼 부드러운 육질도 드물다 나는 늘 이런 상식에 굴복한다 상식은 궁극의 예술이다 창조는 내 친구 이름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곧잘 나의 외모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그는 심정적으로는 늘 여성을 지향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를 그릴 수 있겠다고 썼던 스무 살의 내가 서른여섯 살의 나보다 더 또렷하다 다시 와인을 따른다 오래전에 깨진 와인잔이 붉은 물길을 연다 오래전에 깨진 것들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그건 일종의 원형상징이다 또 안녕이 왔다 와인잔을 따르니 와인이 넘실거린다 新約을 뜯어 먹던 스무 살의 내가 사전을 뒤적여 '寶血;이란 단어를 흡수한다 이 씁쓰레 달콤한 맛 내가 단어를 말할 때 단어는 말해지고 싶지 않은 나를 말한다 후자가 결정적이다 안녕이 간다 안녕 그것은 性器가 없다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다 깨진 와인잔이 빈다 빈다는 베인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깨진 와인잔이 날 빈다 나는 안녕에 베인다 안녕 그것은 만화에서나 보던 육식식물을 닮았다 나는 몸소 안녕을 체현한다 안녕 이 말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살갑다
강정 시인 / 너를 죽인 후, 다시 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너를 다시 만난다 죽이려는 건 아니었는데 내 마지막 살들이 흔들리며 다시 바다, 瀕死(빈사)의 넋이 물결 위에 떠돌며 너는 한 잎 꽃다운 피를 깨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바다의 피가 되고 오물이 되는 내 마지막 살겨운 실수의 動線(동선)으로 퍼붓는 비, 너를 죽이는 나는 그 언제도 내 것이지 않았던 無念無想의 팔을 쳐들었다 빗물에 깍여 칼자루로 곤두선 팔 끝이 빗물이 여린 물고를 찔렀다 하늘 높은 곳에서 비는 핏물의 그림자, 파닥파닥 젖은 땅을 튀기며 핏물이 다시 없는 눈물의 잎사귀를 틔웠다 길과 길들이 그 아래에서 끊어지고 세상이 온통 피의 바다, 피의 속도로 내질러갔다 죽은 길들의 등피가 바다에 묶이고 하늘의 모든 물방울들이 줄기차게 땅을 뒤섞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태양, 바다의 끝에서 끝끝내 바다가 되어버리는
바다와 노을이 섞여 피가 되는 곳, 다시 바다에서, 入棺과 再生의 절차가 다시,거기서, 개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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