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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수 시인 / 석정의 바다
노을이 없어도 바다는 슬퍼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짓누르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바다는 절망하지 않았다 서해가 닻을 내리고 어둠이 몰려올 때도 수평선 너머에서는 새벽을 끌고 오는 바다가 있었다 석정의 바다 그 너그러운 몸짓 손가락 하나라도 어둠에 적시지 않은 절대 자유를 향한 넉넉한 그리움 밤 깊을수록 침묵하는 군상들을 흔들며 해원에서 용솟음치는 소리를 모아 어둠을 뚫고 일어서는 해일을 불렀다 이념을 뛰어넘어 세상을 깨우는 해일 날개 부러진 바닷새의 깃털 하나도 당신의 바다는 팔 벌려 껴안았다 생명을 포효하는 이빨 하나로도 비굴을 거스르며 우리의 곁으로 오는 바다 더디게 더디게 강철 같은 어둠을 가르고 당신의 바다에서 세상은 눈을 뜬다 출렁이며 다가오는 석정의 바다 지금도 부안에 가면 어둠을 거부하는 석정의 바다가 일체의 거짓을 말살하고 우리 곁으로 온다.
정군수 시인 / 국화
창백한 번뇌가 네 얼굴에 스며들 때면 국화, 봉오리 맺는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낡은 유행가가 되고 네 눈물샘 눈물 모두 말라 보고 싶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날 국화, 향기를 부른다 갑사댕기 열두 폭 반물치마 흔들림도 가고 가시 돋친 네 목청 육자배기 새순처럼 돋아날 때 국화, 빛을 띄운다 네 마음 우리어낸 창호지에 저녁놀 스며들면 국화, 혼자서 시든다
정군수 시인 / 추석 고향집
고향집 우물가 놋대야에는 그 옛날의 보름달이 뜨고 있으리
흰 고무신 백설 같이 닦아내던 누이 손끝 고운 그리움도 남아 있으리
눈엔 듯 보이는 듯 뒤안길 서성이면 장독대에는 달빛 푸르던 새금파리
어머니의 눈에 비친 안쓰러움도 오늘밤엔 기다림으로 남아 있으리
굴렁쇠 안에 뜨는 둥근 보름달 고샅길 이슬 맞고 달려오면은
달빛 받아 피어나던 할아버지 수염 박꽃 같은 웃음도 남아 있으리
정군수 시인 / 수련(睡蓮) -- 김제 시비공원의 수련을 보고
내 임은 수련 속에서 잠을 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라 별들의 언어를 밤마다 새기며 시인들의 꿈속에 함께 꿈을 꾼다.
내 임은 수련 속에서 잠을 깬다. 아침마다 새 옷 입는 백자의 살결 간밤의 언어들을 선홍으로 물들이며 가슴 설레게 누구를 기다린다.
내 임은 수련 속에서 치마끈을 푼다. 손닿으면 모두 다 스러질 것을 빛 닿으면 저 물살 떠나갈 것을 한낮의 고요에 몸을 맡긴다.
내 임은 수련 속에서 거울을 본다. 시어를 깎아내는 돌의 아픔 물밑 진흙땅에서 뿌리로 감싸고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살아간다.
정군수 시인 / 비움을 만나고서야
새는 비어 있는 뼈 마디마디에 동토凍土의 눈보라도 열사熱砂의 모래바람도 불러들여 원시의 하늘을 날아 숲으로 온다
나무가 바람소리를 지니고 사는 것은 새의 빈 뼈에서 흘러나온 바람의 홀씨가 가지와 가지 사이에 노래의 음계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태풍 불어 사과가 떨어질 때 새소리가 떨어지지 않고 둥지를 트는 것은 새들의 빈 뼈를 만유인력이 제일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비움을 만나고서야 바람도 성내지 않고 천둥이 벼락이 몰아쳐도 천상의 노래를 지어낸다.
-계간 『문예연구』 2024년 봄호
정군수 시인 / 순수 물 긷는 아침 호박꽃 안에서 해가 뜬다 물 긷는어머니 눈썹 안에서 해가 뜬다 똬리 위의 물동이 안에서 해가 뜬다 어머니 손가락에 끼인 외짝 순금 반지 그 안에서 해가 뜬다 -계간 『문예연구』 (2024년 봄호)
정군수 시인 / 빨간 추억
언제쯤 당신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나요. 편지 넣고 수줍게 돌아서던 소녀를 보았나요 소식밥 먹고 사는 우체통 그리움 먹고 사는 빨간 우체통
이제 밥 주는 이 없어 배고파 고물로 실려갑니다 우체부 기다리던 소녀가 그새 할머니 되어 빨간 우체통 빈자리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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