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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표균 시인 / 하루라는 윤회
울어도 하루는 가고 웃어도 하루는 간다
울어도 내일은 오고 웃어도 내일은 온다
오늘이 가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일까
울거나 웃거나 가는 하루 사이에도 새싹은 돋고
신발 벗어 손에 든 사람들 천지간에 길을 내서
구름 타고 한 바퀴 지구를 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신표균 시인 / 당뇨애인
전혀 뜻밖에 내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예상치도 바라지도 않은 그가 짝사랑을 해왔는지 집시되어 떠돌다 손잡아 주는 이 하나 없자 나를 찜한 모양입니다 징그러워 온 몸 움츠리는데 그는 신이 나서 혈관타고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며 내 육체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뜨는 밥숟가락에도 제 먼저 올라앉고 물 한 모금 과일 한 쪽 먹는데도 떨어질 줄 모릅니다 싫다고 싫다고 밀쳐내도 진드기처럼 붙어 다닙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라치면 마누라 사이에 끼어들어 커튼을 칩니다 아! 이젠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어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쓰다듬고 보듬어 동반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뇨애인
―시집 『어레미로 본 세상』 (심상, 2009)
신표균 시인 /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사춘기를 앓기에는 봄날의 보폭이 너무 짧아 삼월이 종종걸음 친 다음에야 깨우쳤습니다
자목련 큰언니 부풀어 오른 암꽃이삭 버들강아지 칭얼대는 옹알이 듣고서야 브래지어 뽕 터진다는 것 삼월이 꼬리 감추려 할 즈음에야 눈치챘습니다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봄꽃 네 자매 홍역 같기도 하고 황달 같기도 한 젖몸살 돌림병 앓는 줄 삼월이 그림자 거둘 무렵에야 깨달았습니다
겨울 궁전에서 동상 견딘 얼음 공주 언 손 봄볕 쬘 사이도 없이 자매들 초경 앓는 신음 견디다 못해 알몸 분신공양, 봄을 익히고 있습니다
어린 처녀 연달래 시집갈 나이 진달래 혼기 놓친 난달래 무덤가 맴돌다 미쳐버린 금달래
슬피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진달래 그렇게 참꽃이 되었습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신표균 시인 / 손
왼 손이 오른 손에게 어쩌다 굳은 살이 그리 박혔느냐 묻는다 오른 손이 왼 손에게 손등에 웬 주름살이냐 대꾸한다
헤어지지 못하고 동고동락해 온 두 팔 반 쯤 벌려 손바닥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얼굴 주근깨 살피며 슬픈 그림자 짓는다
궁핍한 살림 무겁게 살아 온 날들 켜켜이 굳어지고 첩첩이 쌓인 나날
눈길 보내 오는 이 마다않고 내민 넝마 거두어 온 손길로 이 땅은 따뜻하였고 돌아앉아 계산기 두드리는 창백한 손 식은 땀 흘리는데
두 주먹 오무린 손 안엔 푸른 하늘 그득하다
신표균 시인 / 어느 노숙시인이 부르는 노래
부르지 않아도 들꽃은 피어나 들릴듯 말듯 향기 뿜다 보면 자유를 만나게 될텐데 무료급식소 앞에 줄 선 노숙자 날짜 지난 신문으로 자존심 가린 숟가락이 고개 숙이고 서 있다 한 술 밥 위에 양념으로 떨어지는 눈물 두어 방울 미어지는 목구멍, 모래 같은 한 끼니 마주하고 나면 돌아선 숱한 만남들 눈길 거둬간 빈 광장엔 뒤엉킨 발자국만 끝도 시작도 잡히지 않는다
들꽃 한 송이 손에 쥐고 홀로 숨 거둔 어느 노숙시인 화장터에서 조차 만나지 못한 가족 하늘나라에서 애타게 부르고 있는 노래
들꽃 마구 꺾지마라 들풀 함부로 베지마라 푸른 피의 절규니라 못다 핀 풋풋한 영혼 사루는 향연(香煙)이니라
신표균 시인 / 슬픈 뻐꾸기
철의 삼각지대 하늘도 보이지 않는 산비탈에 기대어 편지를 씁니다 수취인도 주소도 흐릿한 편지를 오늘도 쓰고 있습니다
녹슨 만년필에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 묻혀 편지를 씁니다
비목(碑木)에 조차 차마 새길 수 없는 사랑하는 이름이여
구멍 뚫린 철모 고쳐 쓰고 수통에 남은 한 방울 물 타는 혀끝 적셔 끝내 못 다 부른 어머니!
가뿐 한숨 한 모금 한 모금 지친 군번줄에 구슬구슬 사연 엮어 돌 무덤 위 차곡차곡 쌓아 놓았습니다
무심한 하늘 잡초에 얼굴 가려 별빛마저 길 잃고 헤매는 산하 유월의 편지 한 장 전해주지 못한 뻐꾸기는 오늘따라 저리도 슬피우는지요
신표균 시인 / 가장 긴 말
짧으면 석 달 길면 여섯 달 시한부 신경암 환자가 허파로 숨쉬는 이승에서 토해낸 말
"좋아“
"좋아요“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아빠' 말밖에 모르는 세 살 딸, 두 살 아들과 놀이동산 마지막 나들이에서 회전목마 타는 모습 이동침대에 누운 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말
링거에 매달려 하루하루 밤낮이 바뀌어도 한 마디도 없던 그가 저승까지 품고 갈 세상에서 가장 긴 말을 눈에 담는다
대답인지 응석인지 "아빠 "아빠" 철부지들 목소리 커지는데 점점 내려앉는 아빠 눈꺼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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