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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정숙 시인 / 비둘기와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2.
최정숙 시인 / 비둘기와 길

최정숙 시인 / 비둘기와 길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주택과 상가가 밀집한 대낮의 이면도로

부드러운 깃털을 열어 가슴을 다 보여준다

흘깃 본 그 속은 선홍빛이다

지나간 자동차의 뒷모습은 볼 수 없다

길에서 길을 잃은 새

날개를 지니고도 피하지 못했다

뒤뚱대는 몸짓으로

지상에서 밥을 찾던 너

문 열린 식당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배짱

평화의 메신저였던 이름이

유해조류라는 불명예로 추락 된지 오래

분홍색 두 발이 땅 위의 걸음을 멈추었다

파란 하늘 길에 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른다

활짝 날개를 펴고,

 

-<계간문예> 2025년 봄호 신인상 시 당선작

 

 


 

 

최정숙 시인 / 감자

 

 

고만고만한 일곱 형제가

둘러앉은 점심 밥상,

 

끼니로 때울 감자가 익을 무렵

찾아온 이웃 앞에서

 

어머니의 안색은

우리에게 돌아갈

몫을 걱정하고 있었다

 

삶은 감자 때문에

삶은,

감자알만해지고

 

내 알던 인정 많은 어머니는

그렇게 작아져갔다

 

그것이 어머니만의 일인 줄 알았으나

 

씨눈 같은 자식들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생감자처럼 아리게

삶이 쪼그라든다는 걸

 

그 때의 어머니 나이에 이른

지금에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최정숙 시인 / 말 없는 말

 

 

연분홍 꽃길만 있겠니

깎아지른

마른 절벽도 있단다

먼발치 옛 스승님의 말씀

몸도 마음도 지치어

열뜬 미열에

한 시절을 돌아가지만

 

그 시절을 보람 삼아

살라 하시던

들바람처럼 가벼이

살라 하시던

말 없는 말이 인도하는

은빛비늘 출렁이는 계절

머물 듯

가는 듯

흘러가노니.

 

 


 

 

최정숙 시인 / 남해일출

 

 

붉은 태양아래

구름 흘러가고 바람부는데

활짝 피어난 이 목숨꽃

어디에 쓰려나

 

태초에 빛이 있어

그 빛은 나를 만들고

나는 빛과 더불어

너를 빚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네가 거기 있는 까닭

 

하늘이 허락하신

이 모든 것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한편의 꿈이런가

 

 


 

 

최정숙 시인 / 사과를 먹던 오후

 

 

나의 심장이

너의 심연을 탐할 때

이브의 붉은 열매여

걸어온 바람의 숲을

기억하는가

또 네가 지나온 들판의 냄새를

지상의 모든 문 열어 놓으며

바람 한 줄기 품고

산란의 계절들

그 가슴을 넘어온

붉게 물든 결실아

입안 가득 고였던

욕망의 걸음을 지우리

 

부디 이 몸 깊숙이 뿌리내려

그 원시原始의 싹을 틔워다오

울창해서 힘겨웠을 고독이

너의 품에 안겨

무르익던 것처럼

발그레한 내 뺨도

마저 익게 해다오

 

 


 

 

최정숙 시인 / 봉숭아

 

 

보일 듯 말 듯

채울 수 없어

붉어진 그대 마음

아무리 뜨겁다 한들

 

바람 불고

첫눈 나리도록

지우지 못하는

지우지 못하고 기다리는

내 맘 같겠는가

 

분홍빛 손톱에 숨긴

어여쁜 소녀여.

 

 


 

 

최정숙 시인 / 바람의 뜰

 

 

구름은 은빛물결로

허공에도 꽃을 그려

여기도 저기서도

꽃대 끝자락을 흔들거든

 

바람은 말이 없는데

그 모진 풍파를

어디에 새기었는지

한세상 오고가는 자리

고즈넉한 절 마당엔

산 그림자만

무심하더이다

 

혹여 걷다가 지친

몸과 마음이거든

맑은 물로 씻어내듯

산자락 약수 한 사발에

쉬어가라시던

대지의 자취는 어디인가

 

사랑으로 흐르는

뭇 생명의 마음을

안아 키우는 바람의 뜰

그 산자락

섬세한 곡선에 기대어

한 생각을 쉬어가노니.

 

* 밀양 재약산자락 표충사에서

 

 


 

최정숙 시인

계간 <한국문학정신>으로 등단. 숙명여자대학교 실버산업학 석사. 한국문인협회, 현대시문학작가회, 서울시인협회, 짚신문학회 회원. 현재 법무법인 서울제일에서 재직. 강북구상공회 감사. 시집 『영혼, 그 아름다운 사랑』, 『아리랑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