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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시인 / 비둘기와 길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주택과 상가가 밀집한 대낮의 이면도로 부드러운 깃털을 열어 가슴을 다 보여준다 흘깃 본 그 속은 선홍빛이다 지나간 자동차의 뒷모습은 볼 수 없다 길에서 길을 잃은 새 날개를 지니고도 피하지 못했다 뒤뚱대는 몸짓으로 지상에서 밥을 찾던 너 문 열린 식당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배짱 평화의 메신저였던 이름이 유해조류라는 불명예로 추락 된지 오래 분홍색 두 발이 땅 위의 걸음을 멈추었다 파란 하늘 길에 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른다 활짝 날개를 펴고,
-<계간문예> 2025년 봄호 신인상 시 당선작
최정숙 시인 / 감자
고만고만한 일곱 형제가 둘러앉은 점심 밥상,
끼니로 때울 감자가 익을 무렵 찾아온 이웃 앞에서
어머니의 안색은 우리에게 돌아갈 몫을 걱정하고 있었다
삶은 감자 때문에 삶은, 감자알만해지고
내 알던 인정 많은 어머니는 그렇게 작아져갔다
그것이 어머니만의 일인 줄 알았으나
씨눈 같은 자식들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생감자처럼 아리게 삶이 쪼그라든다는 걸
그 때의 어머니 나이에 이른 지금에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최정숙 시인 / 말 없는 말
연분홍 꽃길만 있겠니 깎아지른 마른 절벽도 있단다 먼발치 옛 스승님의 말씀 몸도 마음도 지치어 열뜬 미열에 한 시절을 돌아가지만
그 시절을 보람 삼아 살라 하시던 들바람처럼 가벼이 살라 하시던 말 없는 말이 인도하는 은빛비늘 출렁이는 계절 머물 듯 가는 듯 흘러가노니.
최정숙 시인 / 남해일출
붉은 태양아래 구름 흘러가고 바람부는데 활짝 피어난 이 목숨꽃 어디에 쓰려나
태초에 빛이 있어 그 빛은 나를 만들고 나는 빛과 더불어 너를 빚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네가 거기 있는 까닭
하늘이 허락하신 이 모든 것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한편의 꿈이런가
최정숙 시인 / 사과를 먹던 오후
나의 심장이 너의 심연을 탐할 때 이브의 붉은 열매여 걸어온 바람의 숲을 기억하는가 또 네가 지나온 들판의 냄새를 지상의 모든 문 열어 놓으며 바람 한 줄기 품고 산란의 계절들 그 가슴을 넘어온 붉게 물든 결실아 입안 가득 고였던 욕망의 걸음을 지우리
부디 이 몸 깊숙이 뿌리내려 그 원시原始의 싹을 틔워다오 울창해서 힘겨웠을 고독이 너의 품에 안겨 무르익던 것처럼 발그레한 내 뺨도 마저 익게 해다오
최정숙 시인 / 봉숭아
보일 듯 말 듯 채울 수 없어 붉어진 그대 마음 아무리 뜨겁다 한들
바람 불고 첫눈 나리도록 지우지 못하는 지우지 못하고 기다리는 내 맘 같겠는가
분홍빛 손톱에 숨긴 어여쁜 소녀여.
최정숙 시인 / 바람의 뜰
구름은 은빛물결로 허공에도 꽃을 그려 여기도 저기서도 꽃대 끝자락을 흔들거든
바람은 말이 없는데 그 모진 풍파를 어디에 새기었는지 한세상 오고가는 자리 고즈넉한 절 마당엔 산 그림자만 무심하더이다
혹여 걷다가 지친 몸과 마음이거든 맑은 물로 씻어내듯 산자락 약수 한 사발에 쉬어가라시던 대지의 자취는 어디인가
사랑으로 흐르는 뭇 생명의 마음을 안아 키우는 바람의 뜰 그 산자락 섬세한 곡선에 기대어 한 생각을 쉬어가노니.
* 밀양 재약산자락 표충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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