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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혜경 시인 / 껍데기는 가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2.
노혜경 시인 / 껍데기는 가라

노혜경 시인 / 껍데기는 가라

 

 

쪽파를 까면서 나는 울었네

남의 껍데기를 벗기는데 비전문가인 나는

어디서부터가 속살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네

수북이 수북이 쌓아 놓았네 파릇파릇한 껍데기의 무덤

 

껍데기는 가라? 그래, 껍데기는 가야지.......

 

나도 마음속에 파밭을 키웠네

향그런 꽃가슴 같은 파밭

내 눈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파밭

(그래 봤자 단에 오백 원인 파밭)

 

누군가 내 껍데기를 벗기다 못해 아직

풋풋한 내 망설임이나 자랑이나 희망까지도

미련 없이 내다 버릴 것이

 

두려워서 나는 울었네 쪽파를 까다 말고.

 

-시집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1995년)

 

 


 

 

노혜경 시인 / 밤꽃

 

 

할 일 다 했노라고

 

우동발 같은 밤꽃들이

두 눈 부릅뜨고

떨어진다

 

백야를 걸어

간곡함에 이른 사람처럼

 

온몸을 투신하는

저런 사랑법을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다

 


 

 

노혜경 시인 / 오늘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한동안 귀신들이 찾아오더니

 그 귀신들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어, 불타버린 새들과 코알라가 오더니

 마른 풀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야 라고 바짝 마른 몸에 불씨를 당기며 띠풀이 말하더니

 아무런 생각도 말도 일도 풍경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든 귀신의 말은 아닌 말

 스피노자가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잖아. 내일은 어떤 내일일지 알 수 없으니까 그냥저냥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니 덜 우울해져.

 

 


 

 

노혜경 시인 / 언약

 

 

 꽃들이 몇날 며칠 시소 타는 줄도 모르고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당신의 첫 이름에 산딸나무 한 그루 심어두겠습니다

 

 지금쯤 지상 어디에도 감출 수 없는 하얀 빛으로 내려오는 것이니 먹줄 같은 생의 이쪽과 저쪽을 두루 만지고 온 두 손을 깨끗이 씻어드리겠습니다

 

 뒤꼍으로 돌아앉아서 늘 바람벽 같던 당신의 쉰 목소리 어느 날은 외등도 없는 골목 끝에 은근한 달빛을 불러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설산에 다녀와 오래도록 꿈꾸는 사람처럼 꽃나무들은 허공에 가닿고 그곳에 두고 온 당신의 눈망울에 흰 구름 한 점 담아두겠습니다

 

 


 

 

노혜경 시인 / 낡은 도시와 새로운 시민들의 합창

 

 

정다운 우리 나라, 지붕은 잠들고

거미줄에 새 이슬이 내리네요.

털 많은 다리를 부르르 떨며 어미거미가 잠에서 깨어나고

출렁대며 일순, 시작되는 시간.

 

부산스레 아침을 짓는 것은 메뚜기와 개미들

이런, 너무 오래된 기억 속의 낡은 풍경!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네, 그러나

잠든 지붕밑의 사람들은 아직 꿈이 덜 끝났나봐요

꿈속에서 아침을 먹고

꿈속에서 출근을 하고

꿈속에서 옹이 굵은 나무뿌리를 파내 멀리로 던지면

행복한 저녁에 오는가봐요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면 좋겠나요?

잠들지 못하는 그 많은 밤을 꿈과 바꿀수 있다면 좋겠나요?

꿈의 입에서 자라난 끈적이는 실들이 말들이 뭉쳐서 꿈이 되고

뭉쳐서 아이가 되고,

뭉쳐서 눈에 보이는 욕망이 되면

두 팔 벌리고 옥상에 서서 "다 이루었노라" 이야기하겠나요?

 

얘야, 옥상엔 난간이 없단다

넌 아직 발목도 없단다

이 높은 건물엔 알고 보면 지붕도 없단다

꿈의 어머니가 소릴 질러도 당신은 마냥 좋기만 한가요?

 

두 팔 벌리고 하늘을 향해 추락할 수 있나요?

당신은 꿈의 아들이어서 꿈의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엄마가 당신을 따다가 앞치마에 담을 때까지 한없이

꿈의 하늘을 헤엄쳐 다닐 건가요?

 

오, 아무래도 그런 건 아냐, 꿈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잠들었던 지붕밑, 갑각류의 잠을 걷어내고

당신은 낡은 심장을 꺼내어

핏줄까지 팔딱이는 튼튼한 벽돌을 빚습니다.

무너진 뼈들을 세우고 손을 맞대어 짓는

이 낡은 도시의 새로운 시민들의 합창.

 

 


 

 

노혜경 시인 / 진기한 기록

 

 

라자로가

거의 썩은 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동굴 입구에 나타났을 때

저 더러운 몰골은 죽은 자/산 자에 대한 모욕이라고

아무도/모두가 외치지 않은/외친 것은

(기록자는 신중히 삭제한다)

 

허공 중에 흩어져버린 살과 뼈를 급히 끌어 모아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이

생각처럼 쉽고 즐거운 일이었겠냐고

라자로가 말하지 않은/말한 것은

(기록자는 한 줄 더 삭제한다)

 

너무 긴 세월을 메아리치고 있는

(나는 알아야 한다)

지워져버린 글자들

내가 죽여버린 글자들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

 

 


 

 

노혜경 시인 /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보았죠

이야기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댈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왔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노혜경 시인

1958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1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뜯어먹기 좋은 빵』 『캣츠아이』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에세이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대통령비서실 국정홍보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