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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민경 시인 / 팽창하는 우주
우리는 공간과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해요 아니면 자신과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로 사귀어야죠 오리엔테이션은 언제나 어리둥절해요 다과를 차려놓고 둘러앉아볼까요 나와 공간과 나 처음엔 귓속말, 다음엔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죠 그러나 점점 크게 소리를 쳐야 들리는 곳까지 멀어져요 종이컵 전화라도 만들 걸 그랬어요 벙긋거리는 입으로, 뭐라고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요?
모래사장이 펼쳐져요 집은 멀어지고 나는 자꾸 나에게 돌아가려 애써요
애초에 목소리는 없어요 우리의 혀는 색을 잃었죠 말은 어둠 속에 잠기지만 표정이라도 보이는 곳에 있어줘요 벌써 저기 멀어진 당신 등뒤의 얼굴이 낯설어요 우리 사이엔 발자국이 어지러워요 그곳에 내 문자가 도착이나 할까요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문학동네, 2024
권민경 시인 / 담담
엄마 괜찮아졌다고 생각하지 마 히키코모리 생활을 끝냈다고 내가 다 나은 건 아냐 오늘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가슴을 찢을 거니까 괜찮아졌길 기대하는 맘 알겠지만 그러지 마 내 몸엔 점이 여러 개 사람은 내장에도 점이 난다지 슬픔은 내부의 점 같은 것 그러니까 그냥 둘 수밖에
내가 누굴 만나 대우를 받고 선생님이나 작가님이라 불려도 그대로 아마 교수 따위가 되거나 상을 타도 마찬가지일 거니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야 엄마
찢긴 마음은 꿰맬 수 있는 게 아니야 배나 목의 수술 자국은 잘 아물었지 이제 이해든 반항이든 잊어도 좋을 나이 아빠가 수술대에 올랐을 때도 울지 않던 엄마는 내가 혹 뗄 땐 울었다 — 라는 걸 전해 들었다 나는 오래 마취되어 있었고,
같은 병동에 있던 아줌마가 나한테 잘해 줬는데, 뒤에선 쟤 껌 떼러 온 거래 — 비아냥거렸다는 것도 전해 들었다
그 후로 몇 번
서로 가만두면서 남은 시간을 소모하자 째깍째깍 퀴즈 시간 되면 터지는 폭탄처럼 우리 가족 오락관처럼 깔깔이란 의성어
나는 너희보다 일 잘하는데 약 먹는다고 뒤에서 수군댄다며 무능한 주제에 까라고 해
그러니까 엄마 몇 번의 수술보다 어려운 건 찢긴 마음을 직시하며 빨간 광 역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늦은 오후 — 늦다 늦다는 쓸쓸함
뭐 그런 거니까 나는 그럭저럭 칭찬받고 추켜올려져도 똑같이 쓸쓸한 멍청이로 살아가다 수군수군 자와자와대는 소리처럼 사그라들 거야 원망도 없이 — 늦다 늦된 나는 오늘도 무사히 내일은 덤 덤처럼
권민경 시인 / 시인이라는 유행 직장
놀랍게도 시인도 노동의 기쁨을 안다 한참 이빨을 까고 집에 돌아가는 길
오늘도 빵 한 덩이 뜯을 자격이 생겼다는 그런 생각 한다 창밖은 검고 보이는 건 유령 같은 내 알굴 직장인은 누구나 느낄 멜랑콜리
하지만 우리 퇴근하면 일 얘기 안 하는 거잖아요
퇴근 시간이 분명한데 내게 연락하는 편집자의 카톡 그가 직업인임을 생각한다 거기서 삐져나오는 심란한 마음을 동정심이라 부를 수 없다 보편적인 야근 기피증
나는 직업은 있는데 직장이 없다는 얘기를 되뇌며 오롯이 나에게 소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세상만사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한 신선이 온천에서 반신욕하며 중얼거릴 말
요샌 무협 대신 선협이 유행이다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온갖 더러운 술수가 판친다 도는 선이 아니고 시도 선이 아니다
도를 다 닦으면 이제 뭘 닦아야 해
온천에서 나온 일본원숭이들이 다이슨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계간 아토포스 2023 여름호
권민경 시인 / 동병쌍년 반하는 계기는 랜덤이지만 정신 차렸을 땐 이미 한참 한심해졌고 내가 그리는 숲엔 많은 나무, 자살로 유명한 숲은 일본에 있다. 내 숲은 자꾸 잃어버리고 발견하는 곳, 거기서 찾은 건 오래된 유물이야. 청동 어쩌고 거울, 황동 어쩌고 반지 같은 거야. 어느 시절엔 아름답고 소중했을 빈티지. 멋쟁이의 잇템. 저 새 봐. 내가 분실한 과거로 치장했다. 이왕 잃어버린 것, 누가 잘 썼으면. 킁킁 냄새 맞고 요건 좀 쓸 만하것다. 여기길. 오소리. 오소리가 물어가길. 뭐야 그게 이상해 라는 말 들을 게 뻔하다. 병원은 오리역에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의사가 좋다. 나는 진단한다. 중년을 넘어도 화자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음. 진지한 동시에 낄낄거림. 직업에 재미를 느낌-그 어려운 일을. 네가 고통스러웠다는 건 네 고백을 통해 안다. 네가 고통스러웠다는 것도 늘 고백하지만 구질해서 그만하려는데 잘 안 돼. 자도 자도 졸리면 더 자야 한다고 누가 그랬다. 잠 뿌리를 빼야 한다고. 나는 피지처럼 생긴 잠을 상상한다.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뿌리. 마음에 둔 일도 그렇고 구부러진 모양 오리역 근처엔 수많은 오동나무. 옛날 일이지만. 잠과 마음이 그늘에서 자란다. 빠지지 않은 뿌리 있다. 태양 같은 사람 좋다지만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는 원인. 독서벗. 네가 목맸던 나무는 어느 숲엔 있나. 혹시… 엉뚱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못된 너 때문에 깨어 있다. 그러니 나 말고 너, 너는 쌍년에 반하지 마, 같은 병에 동하지 마. 동정심 없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사귀어 본다. 손차양 그늘 속.
권민경 시인 / 내 태몽을 꿔주겠습니까?
동물원 밖 오르막을 따라 대학병원 많은 찻집 유난히 큰 달 이런 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데엔 이유가 있는 거라고
언덕 너머를 가리키는 표지판 길은 달로 향하고 아무도 꾸지 않은 나의 태몽이 오늘 밤
예고 없이 태어난다는 건 어리둥절하지 환영인지 배척인지 자꾸 눈치를 보게 되니까 나는 태생적으로 눈치가 빨라 이런 내게 어울리는 예고를
언덕으로 뛰는데 밤 나팔꽃 수많은 꽃들이 내 발목을 잡아끌었어 꽃에 쌓인 너는 커다란 나팔꽃 되고
네가 나팔꽃을 꺾었나? 나팔꽃꺾었지
언덕을 넘으면 사람 많은 횡단보도 앞에 닿겠지만 다른 방향에서 뛰어오던 너와 나의 길이 하나로 합쳐질 예고 받은 적 있어? 커다란 나팔꽃 될 거란 소식 들은 것 같아?
이런 날 너와 내가 걷는 데엔 이유가 있으니까 눈치챌 수 있는 체온으로 서로를 태 속에 품고
언덕을 향해 갈 수 있어
-시집 『언어의 시, 시의 언어』 중에서
권민경 시인 / 자연 —미인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세상엔 미인이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미인은 있을 것이고 미인은 무관심 현실감이 없어서 잡히지 않는다 빨간 예쁨 보라 예쁨이 공중에서 부서진다 1999년도의 미인은 세기말이란 수식어까지 달 수 있었고 그건 멸종된 생물 한 종류 같아 어딘지 기이해진다 마인 부우*를 미인 부우로 읽는다 오독은 종종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안내서 이를테면 유전자지도 화성으로 알파 켄타우리로 아무리 멀리 가봤자 심해도 다 가보지 못한 지구인이지 미인은 제멋대로라더라 제멋대로인 건 미인을 규정하는 주둥이지 이 울퉁불퉁아 결국 우린 심해로 갈 것이다 그곳에 미인이 있을지 마인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만화 <드래곤볼> 의 등장인물. 여러 가지 버전이 있으나 흔히 '뚱땡이 부우'라고 부르는 부우가 유명하다.
권민경 시인 / 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
둥둥 올리는 북소리와 둥둥 뛰는 부정맥과 고양되는 기분 고양돼서 사람을 죽이는 개새끼들 씹새끼들 당신은 부피를 갖고 질량을 갖고 무게와 길이로 수치화된다 존재감은 모든 것을 둥치는 말이지만 사랑이여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니, 아니, 사람이여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팀파니를 등등 울리며 걸어갑니다 - 그건 불가합니다 둥둥 올리며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귓구멍으로 들어와 해골과 공명합니다 뇌도 자극합니다 가능합니다 어떤 불가와 가능성이 우리를 한 공간에 몰아놓고 감히 되도 않는 연주를 시키네 쇼스타코비치여 그때 당신이 만든 교향곡에 편성한 팀파니와 팀파니 주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만을 위해 언젠가 팀파니 협주곡을 작곡하겠다는 꿈 이루지 못할 꿈을 뒤로하고 우린 시시각각 클래식이 되는 중 클래식을 회망하는 중 낡은 것 중 쓸 만한 하지만 사랑은 절찬 상영 방영 공연 대유행중이므로 쿵쿵쿵쿵쿵 하고 두 팔을 힘차게 교차하고 킹콩이 되고 —킹콩도 사랑을 했지. 암 그렇고말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중한 것을 지키며 누군가의 가죽이 아닌 스스로의 가죽으로 만든 악기 물리적인 악기 생각과 말이라는 악기 성대는 종종 악기로 비유되고 공간을 꽉 채우는 공명과 텅 빈 객석을 생각합니다 공명과 공동 비어야 소리가 나기에 사랑해주세요 사랑을 주십쇼 감히 가까이 다가가기에도 두려운 우리는 서로의 사상을 검중하며 조심스레 말을 걸지만 증명하시오 당신의 불경함을 당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슬픔과 기쁨을 이것이든 저것이든 이분법적이지 않은 당신의 정체를 해골이 소울을 가득 담아 연주하는 북처럼 경이로운 연주로 팀파니 주자여 찢어진 가슴을 더 두들겨 찢어주시고 새 자루에 새 술 담듯 새 악기에 새 사랑과 새 영혼과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들 가득 담아주소서 사랑이여 담겨주소서 남의 가죽이 아닌 나란 자루에 우승 기원으로 담근 과일주에 연주만을 위해 지어진 전용 홀에 눈구멍 속에 담긴 눈알 같은 이 지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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