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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희석 시인 / 천원의 기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1.
노희석 시인 / 천원의 기적

노희석 시인 / 천원의 기적

 

 

한 달 전에, 동네 가게에 가서 나침반을 샀다

누구도 찾지 않는 감사 나침반이다

주인은 그냥 가져가라는데 나는 천 원을 주고 샀다

나침반 침이 가리키는 데로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고

주인은 그 말을 잊지 않고 내게 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길을 나설 때면

나침반을 늘 목에 걸고 다닌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귀를 닫고 있어도 길이 보였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길을 묻지 않는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가면 그뿐이었다

길을 가다, 꽃을 보아도 감사이고 나무를 만나고

길고양이를 만나도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자, 감사의 파도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밀려왔다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져 날아오를 것만 같은 이 감동

 

나는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인가

아니 날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천원의 기적

나침반이 나를 보고 빙긋 웃는다.

 

 


 

 

노희석 시인 / 그때까지는 왜 몰랐을까

 

 

집이 가까워 지면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는 버릇은

내 탓이 아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

절로 생겨난 버릇을 가지고

나를 붙들고 그 이유 따져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기나 하랴

불도 없는 컴컴한 복도,

열쇠 꺼내어 열쇠 구멍을 찾는다

그 잠깐의 순간에

자물쇠를 따는 것은

왜 열쇠여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병따개가 떠 올랐다

병뚜껑을 따듯 문을 따고 들어가면

너무나 쉬울 터인데

그 좁은 열쇠 구멍 찾느라

허둥대는 내가 싫다,

그래 열쇠를 확 뽑아 던져버리는 거다

그날 이후,주머니 뒤지던

내 버릇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다

젠장,머릿속에 걸어둔

비밀번호 여섯 자리 슬쩍 꺼내

꾹꾹 누르면 그만인 것을

내,그때까지는 왜 몰랐을까

던지는 순간,

해방되고 만다는 것을 왜 왜 왜.

 

 


 

 

노희석 시인 / 무지無知의 지知에 대하여

 

 

델포이 신전 앞에 쓰여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

이천오백 년 동안이나 버티고 있다.

아무리 들춰봐도

알 수가 없는 너라는 존재.

화두라며 툭 던져놓고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는

무지無知의 지知라는 그 말은

한낱,소크라테스의 변명일 뿐이다.

길가는 아테네 사람들,

아무나 붙들고 거머리 같은

질문 쏟아붓고서는

끝내 무지의 뿌리,캐내어

얼굴에다 휙 뿌리고 싱긋이 돌아서는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세상의 악법도 법이라는 것을

아니,독배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자유라는 것을

그는 벌써 깨닫고 있었던 거다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호탕스레 독배를 들었던 소크라테스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럼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묻고 또 물었던 거다.

 

 


 

 

노희석 시인 / 생각의 거울

 

 

세상은 거울 안에 있다.

생각의 깊이만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안에 있다.

생각의 넓이만큼

내다볼 수 있는 거울 안에 있다.

 

책장을 넘길수록 밝아지는

생각의 얼굴,

세상 밖이 온통 환하다.

 

 


 

 

노희석 시인 / 부드러운 것은 언제나 강하다

 

 

나무 막대기처럼 딱딱한 것은 부러지지 쉽고

바위처럼 굳고 단단한 것은 깨지기 쉽다.

오히려 물처럼 부드러운 것은

쇠망치로도 깨트릴 수 없다.

 

부드러운 것은 소리없이 스며든다.

물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물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물 길 트인 곳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웅벽을 치고 막아놓아도

물은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스며든다.

세상에 스며드는 것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며든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젖어들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것이 언제나 강하다.

부드러운 것을 이기려,

길을 갈고 망치를 준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오기나 배짱으로 부드러움을 이길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막아서다가는

어느 순간 부드러움 앞에 무릎 꿇고 만다.

부드러운 것은 따뜻하여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도 물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얼굴이 너그러워진다.

감추어도 절로 피어나는

넉넉한 미소가 핀다.

고향의 저녁 연기처럼

아늑한 어머니 얼굴이 된다.

 

-'생각을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중-

 

 


 

 

노희석 시인 / 수인의 편지 1

 

 

운명은 사슬인가

끊기지 않는

 

돌아서야 한다

막다른 벼랑

잡아주는 이 누구 없어도

 

삐져나오는 한숨까지

다 내 탓이기에

모포 자락 뒤집어쓰고

눈물 견디며 산다

 

당신의 뜻 엎질러놓고

어머니,

이 아들은

일어나야만 합니까.

 

 


 

 

노희석 시인 / 수인의 편지 19

 

 

차라리 모른 척 누워 있을 테니

마음껏 물어뜯으라

내 뼛속까지

 

한 번도 씻어본 적 없는

이 더러운 피를

찬란하게 들이켜다오

한 방울 남김없이

여름모기여

 

나는 목숨이 아니다

청개구리 속에다

애물일 뿐이니

달디달게 마셔다오

 

어머니

당신의 주름살, 귀밑 흰머리

내가 죄인입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시집 『수인의 편지』(도서출판 잠꼬대, 1992)에서

 

 


 

노희석 시인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영남대학교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 법무부에 들어가 영등포구치소 교회사(敎誨師)로 30년간 근무. 한국생각연구소 운영. '태극기 사랑 글짓기 특별공모전' 최우수상. 제3회 둔촌시조시 백일장 장원, 제13회 공무원 문예대전 시조부문 금상 수상. 1990년 "시대문학' 시 부문에 '우체통 앞에서'란 시로 등단. 시집 <수인의 편지> <당신은 어느 별의 사람입니까> <세상을 건너는 지혜>. 수필집 <생각을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 <세상을 이기는 77가지 생각>.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