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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명순 시인 / 오래 닫힌창窓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1.
류명순 시인 / 오래 닫힌창窓

류명순 시인 / 오래 닫힌창窓

 

 

저 혼자 산 공기가 두껍다

유리창 깊숙이 뿌리를 내린 먼지의 격자무늬

직각으로 교차한 문살무늬를 지워본다

풍경을 적시던 창, 가만 들여다보면

햇살에 낫을 벼리던 사내들은 간데없고

흑백사진 속에 갇힌 三代의 쑥스러운 웃음만

마른 창들에 걸려 위태롭다

이따금씩 걸려드는 새털구름 사이로

노랗게 익은 햇살이

빈집의 젖은 추억을 빨아먹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안과 밖의 경계가 두꺼운 침묵 속에 안주하게 된

것은.

굵게 금간 유리창이

툭툭, 상처의 비늘들을 떨어트린다

풍경이 유리창을 적신다

백 년을 지나온 묵은 길같이

바람에 몸 긁히며 길들여진 세월만

가슴에 품고 삭이고 있다

 

풍경이 풍경을 적신다

누군가 젖은 몸 빠져나간 자리마다

노을 가득 밑그림만 남았다

속내를 알 길 없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두드리며 안부를 묻는다

웃자란 유리창의 기억이

꽁지 노란 새 한 마리 푸드덕 날려보낸다

 

 


 

 

류명순 시인 / 말의 풍경

 

 

놀이터 말소리가 아파트 전체를 흔든다

벽의 균열을 전화선처럼 타고 기어올라

유리창에 사람 모양을 그리고 있다

창들은 소음과 동작을 막으려고 애쓴다

파도와 소리가 섞여 유리창을 긁는다

기어이 팔층 창문을 열어젖힌 말들이

소파에 앉는다, 사람의 외모를 가진

슬픈 말, 거친 말, 화난 말,

강조를 덧붙인 쌍자음의 욕설들,

말이 말의 길을 따라다니며 집안을 뒤흔든다

가만히 들어 보면

누가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내가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밝은 대낮인데도

유리창에 검은 모습을 밝히고 있다

전도체로 충만한 말들이

벽의 균열과 사람의 균열을 타고 거침없다

사람들이 어둠으로 창을 닦는다

살의를 키우지 않으려고 잠든 척한다

 

ㅡ 『POSITION포지션』(2021, 여름호)

 

 


 

 

류명순 시인 / 공원도 관절통을 앓는다

 

 

늙은 고양이 두 마리 공원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한 마리는 조심조심 갈之자로 내려오고

또 한 마리는 앞을 보며 절뚝절뚝 내려온다

절룩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더 절뚝거린다

무릎이 아픈지 잠시 쉬다가 다시 절뚝거린다

바람도 절뚝거리며 쫓아온다

산길도 비틀대며 따라온다

낙엽들도 절뚝거리며 굴러온다

햇볕도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온다

저물어 가는 공원이 모두 절뚝거린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머리가 하얀 노인도

운동을 한다고 모두 절뚝거린다

똑바로 걷는 것 같지만 자꾸 삐딱해진다

녹슨 운동기구도 저 혼자 삐걱 거리고 있다

늙은 소나무도 덩달아 솔가지를 절뚝절뚝 흔든다

금방이라도 툭 부러질 것 같다

소나무 관절이 투두둑 소리를 낸다

솔방울 하나가 뒤뚝뒤뚝 굴러간다

 

 


 

 

류명순 시인 / 바람의 세일즈

-세상에 말을 걸다

 

 

외곽으로 달리는 것은 바퀴가 아니라 나의 생이다

매일 목마르게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네 생이 변방이라면, 나의 중심은 바퀴 위에 얹혀 있는 바람이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단지 살기 위해 스스로 경계를 허물고

또 다시 영역을 넓혀가는 바람은, 절대 스케줄을 놓치지 않는다

오늘의 프로젝트를 관통하려면 속도를 배가시켜야 한다

 

갑론을박의 계약된 하루를 성립시켜 가는 바람

포장마차 한편에서 우동 한 그릇을 시켜놓고

파업을 선언한 나무젓가락을 쪼개며 달려온 시간을 계산해본다

 

웅크린 어깨를 주무르며 바람이 마케팅을 시작한다

흔들어 팔고도 새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의 상술

누구나 넘어가기 좋은 저녁이다

사람들은 평상에 앉아 감원 바람에도 꿋꿋한 가로수를 보며

소주 한잔과 갯장어 한 접시에 내일을 흥정한다

 

어디선가 또 바람이 바람을 부른다

기약 없는 바람의 가속에 실려 바쁜 생을 건너간다

바람이 멈추는 그곳에 또 다른 영역을 찾아

미완성인 바람의 세일즈는 멈출 줄을 모른다

 

 


 

 

류명순 시인 / 에덴동산에 사는 이브

 

 

먼저 그녀의 기억이 그녀를 버렸다

덩달아 세탁기가 그녀를 버리더니

청소기가 그녀를 버렸다

집도 가끔 그녀를 버렸다

백두 번이나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에 없는 자식들을

그녀가 버렸다

언제나 둘이 가던 길을 혼자 가고 있다

그녀는 에덴동산에 혼자가 되었다

이브를 홀린 뱀도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도

온데간데없다

단지 그녀를 버리지 않은 것은

밥뿐이었다

 

그녀를 내다 버린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시집 <새들도 변종을 꿈꾼다>에서

 

 


 

 

류명순 시인 / 염천

 

 

오후의 햇살이 내 허리를 잡는다

아랫배가 뜨겁고 안경 밑으로 이슬이 맺힌다

기분 나쁜 질감이 온몸을 조여온다

편두통 몇 개가 지나간다

며칠째 잠 못 이루며 백야를 보는데

어깨를 축 늘어트린 창밖의 풀잎들

풋과일들 죄지은 듯 염천 하늘에 목매고 있다

 

호수의 물은 김빠진 맥주처럼 졸고

계곡엔 푸른 소리가 끊긴 채 운무만 가득하다

땡볕은 한 생을 마감하는 화장에 불꽃을 붙이며 활활 태우고 있다

칠십일 년의 삶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는 불꽃의 위력은

몇십 년 만에 온다는 폭염과 같은 맥락이다

배배 꼬인 고추 잎을 고라니가 갉아먹고 산으로 달아나고 있다

 

언제나 저기압이 지나갈지

까마득히 하늘만 바라보는 콩잎 사이로

한낮의 햇살은 유난히 더디게 간다

이달 들어 몇 번이나 오는 재난 문자

폭염주의보에 기억도 없이 먹은 더위는 나갈 줄도 모르고

몇 날을 뒤채이며 숨을 고르고 있다

시간에 걸려, 매미 소리에 홀린 건지

8월이 공간에 갇혀있다

 

 


 

 

류명순 시인 / 석장(石墻)의 비밀

 

 

간밤의 세찬 비바람이

종갓집 석장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견고한 담이

힘없이 안채의 실체를 드러냈다

벽보가 동강나고 낙서가 잘려나가고

술 취한 김 씨의 그것도 보았을 석장이

제 몸을 와해시켜 안과 밖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한동안, 종갓집 비밀들이 이끼처럼 붙어 통제되어왔다

집안에 크고 작은 흥망성쇠들,

종손이 없어 외도까지 한 종가 어른의 장례까지 보았던, 비밀

결연한 역사를 해체하여 혼돈 속으로 사라졌다

담의 실체는 종가의 비밀을 알고도 침묵하는 것

가장 많은 내력을 보고 가려주었던 곳이다

가로막이 사라진 그곳

묵은 이끼와 흙먼지들이 통제구역을 벗어났다

종가의 내력들을 고스란히 묻고

대를 이어 백여 년을 지탱해온 늙은 석장이

오래전,

주인 잃은 상실을 끝내 주체하지 못하고

종갓집 대대로 이어온 비밀을 묻어두려는지

푸른 이끼를 끌어안고 돌무덤이 되어버렸다

 

 


 

류명순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문화교양학부 졸업. 2012년 《시작》 신인상 수상 등단. 시집 『새들도 변종을 꿈꾼다』. 〈동서커피문학상〉 〈방송대학문학상〉 수상. ‘시인회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