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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룡 시인 / 안개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0.
박성룡 시인 / 안개비

박성룡 시인 / 안개비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이 세상 풍경들은 모두

푸르스름한 모기장 속에

갇혀 있다.

 

인간이 아무리

빗방울을 잘게 썰 수 있다 한들

이런 조화(造化)를 이룰 수 있으랴.

 

물방울까지 이렇게 잘게 써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박성룡 시인 / 과목(果木)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해,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

 

 


 

 

박성룡 시인 /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 새 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되찾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박성룡 시인 / 동행

 

두 사람이 아득한 길을 걸어왔는데

발자국은 한 사람 것만 찍혔다

 

한때는 황홀한 꽃길 걸으며 가시밭길도 헤치며

낮은 언덕 높은 산도 오르내리면서

 

한 사람 한눈 팔면

한 사람이 이끌며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고달프기도 했던 평행의 레일 위에

 

어느덧 계절도 저물어

가을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박성룡 시인 / 뜨거운 가을

 

 

사루비아

백일홍

그 위에 또 달리아까지

아직은

뜨거운 꽃들이 피어 있기에

우리들의 가슴은 식지 않는다

앞뜰,뒤뜰

현관마다,교정마다

아직은 숯불같이 뜨거운 꽃들이

피어 있기에

우리들의 가슴은 식지 않는다

아,이 가을엔

설령 사랑쯤 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가슴은 식지 않는다

 

 


 

 

박성룡 시인 / 이슬

 

 

나는 끝끝내

이 지상의 풀섶에 맺혔던 이들을

보석이라 부르다가

밤마다 항桓)과 유(遊)의

붉고 푸른 천체들이

그 칠흑의 천상을 장식하는 동안

이 지상의 수풀 위에 머물렀던 이슬들을

나는 끝끝내 꽃이라 부르다가

그 모든 것들의

시작과 결론을

다시 그들의 흥망성쇠를

풍미해버리려던 태풍과 뇌우에도

변질을 거부해온 천애의 섭리와 한오래기 엷은 미품에도 결국은

너와 내가 인멸

그러나 아 나는 끝끝내

이 반공()에 중립하여 할

이곳의 황토 위에 이름없이 져버린 이슬들을

보석이라 부르다가

꽃이라 부르다가

그들이 머금었던 광량(

그들이 소요했던 시공(時空)

그들이 함유했던 각자의 체적들,

(비록 그것들은 저 먼 곳의 천체들과

몇천 몇만의 광년으로 거리는 하고 있었으나)

아나는 끝끝내

이나의 이웃에서

이름없이 맺혔다 져버린 이슬들을

꽃이라 부르다가

보석이라 부르다가......

 

 


 

 

박성룡 시인 / 양귀비(楊貴妃) 꽃

잡으면 꺼질 듯한

안으면 더욱 짓이겨질 듯한 저 꽃이

한때는 중국 대륙(中國大陸) 전체를 취하게 했던

양귀비(楊貴妃) 꽃,

1년생 초본(草本)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낙일(落日)의 뜰을 훤히 밝히는

재색(才色)의 꽃,

눈을 감으면

당(唐) 나라의 현종(玄宗)이 춤을 춘다.

수왕(壽王)이 미쳐서 춤을 춘다.

양귀비(楊貴妃)가 알몸으로

춤을 춘다.

흔들면 꺾일 듯한

입술을 갖다 대면

더욱 간드러질 듯한 저 요태(妖態)가

한때는 중국 대륙(中國大陸) 전체를 취하게 했던

앵속과의 한해살이 꽃,

눈을 감으면

춤을 춘다.

수많은 나체(裸體)의 군상(群像)이

그 둘레에서 춤을 춘다.

숙취(宿醉) 하여 춤을 춘다.

 

 


 

박성룡 시인 (1934-2002)

1934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 영문과 수학. 1956년 「문학예술」에 「화병정경」 등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춘하추동」 「동백꽃」 「휘파람새」 「꽃상여」 「고향은 땅끝」 등. 중학교 교과서 詩 <풀잎>수록. 전남도 문화상, 현대문학상, 시문학상, 호남문학상, 제펜클럽한국본부문학상 등 수상. 「사상계」, 「민국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등 언론계 종사, 현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