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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란 시인 / 구멍 하나
한 나절 복잡한 길 걷는다
사람도 강아지도 나무도 하나 하나 다 다른 느낌 주지만
우리 안에 같은 것 하나 있는 것 같아
그건 아마 구멍 따스하고 미세한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구멍 하나
류혜란 시인 / 단지
4월 바다에 잠겨있는 배 안의 어린아이야 단지 나는 네가 되어 숨 쉬고 싶구나 우왕좌왕하는 세상엔 간절히 사랑할 기회 주는 것인 너의 천근 영혼을 취해 단지 나 나를 가라앉히며 적막에 눌린 온전한 네가 되어 점점 망각되는 이방 아이가 되어 단지 빛도 없이 머문 채로만 나는 누구의 흐느낌 속에 작은 온기를 심을 것 같아
류혜란 시인 / 의자가 없는 거리
의자를 뺀 거리에 슬픔들이 쉼 없이 걸어다닙니다 슬픔 하나가 빨리빨리 담배를 태우고 슬픔 하나가 빈속에 커피를 붓는 대가로 카페에 잠깐 겨우 앉아있다 갑니다 슬픔 하나가 오지 않는 연인을 오래 서서 기다리다 일그러진 얼굴 쇼윈도에 감춥니다 어떤 슬픔도 안식할 수 없는 거리 나와 너와 생각과 느낌이 엉거주춤히 돌고 돌다 상실되어야하는 슬픔의 거리 가로등이 밝자 숨어있던 누더기슬픔 하나만이 언 땅바닥을 잠자리로 찾아옵니다 의자가 없는 거리에서 슬픔들이 하하호호 만취해 토악질을 하고 떠난 자리에서 슬픔 하나만이 자기 슬픔 감각합니다 여기 의자가 있기를 새파란 입술로 기도합니다
류혜란 시인 / 無名花
노을에 물든 귀갓길 내 눈물 머금은 골목 보푸라기처럼 일어난 무명화를 지나간 후 하루의 상처 아물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스스한 꽃에게 목례하거나 물 한 모금 대접하지도 않았지만 새로 생긴 상처 시릿해, 간절한 몽중인 듯 그 호명되지 않는 꽃을 지나갈 때 무명화의 위로가 금빛 햇발처럼 등 감쌌다 내일도 다시 그저 사랑하면 돼 꽉 찬 울림으로 대대로 고요히 피고지며 나의 신발마다 씨앗 붙이던 무명화 버려진 개가 자꾸 찾아와 냄새를 마시며 보잘것없는 나를 지나가는 저녁이 뭉클하다
류혜란 시인 / 오천원은 늘 남겨두었으면 좋겠어
한달치 생활비 받아두는 현금카드에 오천원은 늘 남아있었으면 좋겠어 약속장소 가기 전 들른 꽃집에서 꽃 한 송이 살 돈은 남아있었으면 혹여 밥벌이할 수 있는 때 오더라도 오지 않더라도 내 마음속에 오천원은 늘 남겨두었으면 좋겠어
류혜란 시인 / 의자나무
하늘가 너른 마당에 의자 모양으로 자란 나무 있는데 기묘한 그 나무, 새들은 왜 좋아하는가 실향한 새들 끊임없이 깃드는 의자나무에 사람들도 반해 모든 이, 그곳에 앉게 되곤 했다
그동안에 영혼들 '아름다워졌다' 새들과 처음 입 맞추며 노래했고 불면 앓는 이 그리운 꿈 꿨다 가슴속엔 봄물의 길 메마른 시인 그렇게 시심 찾았고 아, 제 마음뿐인 이들은 누군가의 고통 느끼기 시작했다 하여 제 무릎에 더 약한 이를 앉히는 기쁨 알았다
의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들썩이지도 기울지도 않았다 아름답게 구부린 몸으로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마음으로 의자나무 단지 '살아있었다'
뿌리는 물과 잎은 햇빛과 스미며 그에게 깃든 모든 심장들 달라지게 했다
하늘가 너른 마당에 의자 모양으로 자란 사랑 있다
류혜란 시인 /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소식
내가 무언가와 싸우던 끝에 완전하게 진 날 후회할 일들과 잘잘못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은 전해오네 지금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승리할 수 없는 삶일지라도 누군가가 날 사랑한다 봄처럼 따뜻한 그 소식에 나는 이기고 짐에 상관 없는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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