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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희 시인 / 뒤뜰에 대한 기억
수유를 마치면 키 작은 돌담에 등을 내려놓았다 텃밭에 자란 오이로 목을 축이고 돌담에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 대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와 다투던 밤 달빛에 기댄 채 그림자로 울던 꽃무늬 손수건을 좋아했던 젊은 그녀
주름이 깊어질수록 뒤뜰과 멀어지고 등이 떠난 돌담에는 이끼가 혼자 놀고 있다
뒤뜰과 엄마는 돌아오는 계절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집 <풀이라서 다행이다>에서
한영희 시인 / 숲, 서정 구름은 바람과 비를 불러 땅으로 내려옵니다 닭의장풀을 업어 키우고 사춘기 사과나무 얼굴을 간지럽히고 해바라기를 울립니다 달맞이꽃이 흔들립니다 착한 해가 얼굴을 내밀면 부드러운 햇빛 생크림 서너 조각 꺼내먹어요 웅크린 마음이 깨어나는 시간 해가 호호 웃으면 나는 히히 웃습니다 무작정 떠나는 민들레 씨앗 같은 봄날의 서정에 휩쓸려 나뭇가지를 붙잡고 부드럽게 굴려도 손만 아픈 돌덩이 돌덩이 먼 데서 때까치 서럽게 웁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한영희 시인 / 떨림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집에 들어와 어름*으로 거미의 혼을 빼놓고 있는데 길고양이 밥자리를 놓고 숨박꼭질 놀이를 시작한다 스무 날쯤 굶어 기어갈 힘조차 없는 거미와 바람을 노래하는 어름꾼이 하나가 되는 시간 날개옷을 입어도 먹이로 결정되는 줄타기의 법칙 냄새를 버리는 사람들 허기를 먹는 고양이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보며 포식자라는 이름이 달리는 것인데 가슴 뛰는 숨소리는 탄력을 묘사하고 물이 빠져나간 껍질을 바람의 등에 실어 보낸다 치워진 밥그릇은 어디에 숨겨놓아야 하나
*남사당놀이의 줄타기 재주
한영희 시인 / 봄에서 여름 사이
우산이 사람을 매달고 날아오른다. 우산은 구석에 등을 의지한 채 온몸이 젖어드는 외출을 꿈꿔왔을 것이다. 날개를 펼치는 횟수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것일까 낡아버린 손과 휘어진 갈비뼈가 위태로워 보인다. 소란한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고 있다. 틈을 비집고 스며드는 비의 시체들 무릎을 구부릴 때마다 지상에는 웅덩이가 생겨났다 지워진다. 바닥에 무지개가 뜬다 꽃몸살을 앓던 개나리가 죽고 민들레는 새끼들을 찾아서 흩어진다 채워도 자꾸만 비워지는 어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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