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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숙영 시인 / 투명한 청소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2.
홍숙영 시인 / 투명한 청소원

홍숙영 시인 / 투명한 청소원

 

 

겹겹이 주름이 잡힌 나날들

구부러진 선과 구겨진 면을 제대로 다리는 일이 일과이다

 

오르내리는 지루한 계단에서 밥이 태어나고

얼룩진 어제를 소매에 감춘 채 뻣뻣해지는 안을 다독이면

바닥이 매끈해진다

 

마법의 빗자루를 타고 공중을 날아가는 마녀는

이 바닥 출신일까

 

꽉 막힌 화장실을 뚫는 일은

허공의 빗장을 열어 반짝이는 창문을 얻는 것

냉기 서린 타일 벽에 피어나는 믹스커피의 온기에

온 힘을 다해 걸레를 쥐어짜면 시클라멘도 질세라 꽃을 뒤집지

 

삶의 연장이 닳아버린 당신의 연장

막내가 대학 갈 때까지만

온몸에 혓바늘이 돋아 눈만 내놓은

이슬람 여인처럼 환하게

 

 


 

 

홍숙영 시인 / Paris

 

 

꿈틀거리는 너의 지하철에서

보들레르를 읽고,

푸른 너의 동탑에 올라

회색 지붕들을 바라보지.

너의 샘물엔 배를 띄운 아이들

너의 벤치엔 사랑을 소비하는 젊은 연인들

너의 몽마르뜨에서

다뉴브 강을 켜는 거리의 악사에게

동전 몇 닢 쥐어주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이는 너의 성당에

기다란 촛불하나 켜두고,

좁은 너의 카페에서 무릎을 맞대고

죽음보다 진한 에스프레스를 마신 뒤

27번 버스를 타고 똘비악에서 내리면

삐걱거리는 계단 끝에 매달린 너의 스튜디오.

커튼을 걷어 너의 달빛이 들어오면

거기서 우린 너의 낭만을 만나.

 

 


 

 

홍숙영 시인 / 별을 대적하다

 

 

 나는 바람의 종족

 어깨에도 꽁지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지

 오늘도 운 좋게 만사일생

 겁 없이 대로를 유유히 돌아다니지

 당신이 내다 버린 작은 사랑을 주워 담고 한 시절 뜨거웠을 침대를 폐기하지

 

 사막여우보다 커다란 귀로 나는 당신의 기도를 듣고 어둠 속에서 올빼미의 눈으로 정수리를 꿰뚫어 보지

 낮에는 반지하에서 잠을 자 암막 커튼을 치지 않아도 어두운 굴속이지만 단잠은 멀리 있어 잠이 부족해도 고도의 집중력으로 일을 마무리해야만 해

 

 낮이 저무는 끝에서 열리는 밤의 땅,이윽고 따뜻한 새싹이 움트면 나는 차가운 바닥에 허기를 앉히지

 슬픔이 예의 바르게 적막을 뚫고 인사를 드리면 민첩하게 후루룩 이슬을 마시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형광색 입김

 잘려도 다시 자라나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재생하는 빛의 꼬리를 흔들며 사막을 건너지

 

 내 안의 반딧불로 별을 대적하는 밤,

 말 거는 이 없는 고요가 무리 지어 몰려오지 고요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쓱싹쓱싹 능숙하게 바닥을 쓸어내리지 밤을 건너 새벽까지

 

 


 

 

홍숙영 시인 / 갑사의 3월

 

 

열두 살 소녀의 젖가슴처럼 한창 망울지며

힘겹게 꽃이 올라오던 벚나무그늘 아래

노랗게 잔물결 일으키며 산책 나온 나비 한 마리

대웅전의 말려 올라간 처마 끝 풍경 소리에 맞춰

너울대며 날아다녔죠

 

소소리바람에도 나비는 심하게 흔들리고 방황하고 때로는 고독했어요

 

잠시 날갯짓을 멈추고 내면의 소리를 들어봐요

2억 3천만 년 동안 거북이는

갑 속으로 머리를 끌어넣어 안으로 깊어지는 법을 터득했대요

 

저 꽃이 무진장 터질 무렵이면

바람은 멈추고 그늘은 깊어지고

연정은 불타오르고 그만큼 상혼은 지독해지고

풍경소리는 한층 그윽해질 테죠

 

 


 

 

홍숙영 시인 / 경계에 사는 여자II

 

 

 생각의 솔기를 이어 다가올 날들을 꿰매며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 소리 없는 통증이 허리를 지나 무릎까지 퍼지고 지난한 시간의 욕정이 떠올라도 여자는 일정한 간격으로 땀을 이었다. 부도난 달이 아버지를 굽어보다 바람난 별을 따라 나설 때 불면의 시간을 보낸 말들이 상념의 마구간을 뛰쳐나와 우르르 평원으로 쏟아졌다. 메밀꽃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생애를 응원하고 침울한 바늘에 찔려 붉게 물든 꽃송이들, 살다보면 한 번씩 붉어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말들의 질주가 더욱 거칠어지고, 꽃들의 탄성이 절정에 달하면, 후림불에 정신이 홀린 손끝에서 길을 잃고 떨어지는 바늘 하나. 시작과 끝의 능선에 여자의 안장이 놓인다.

 

 


 

 

홍숙영 시인 / 하늘 분양

 

 

방이 없다는 부동산 사장을 졸라

옥탑방에서 하늘을 분양받았죠

창을 넘는 햇살은 무허가

손끝에 박인 슬픔의 굳은살을 누르며

빛바랜 천장을 밀쳐내면

 

곱창 같은 골목 군데군데 시멘트를 덧댄

가난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바람벽을 붙잡고

하루를 질끈 묶은 노을에 잊었던 약속이 생각났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걸까요

아침저녁 커다란 창을 열고

거실에 수평선을 들이자고 했죠

창으로 넘어오는 파도 소리 들으며

잔잔한 물결처럼 살자던 그때

 

이미 어긋난 첫걸음이 시작된 거죠

얌전한 바다도 바람의 등쌀에 화를 내며

무엇이든 삼켜 버리잖아요

그렇게 휩쓸려 다니다

어느 순간 손을 놓아버린 거예요

 

그 끝을 잡고 나는 나를 말려요

잘려나간 미래가 문틈으로 부풀어 올라요

 

 


 

 

홍숙영 시인 / 슬픔을 요리하는 법

 

 

창으로 밝아오는 기운에 눈을 열고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챙겨

삶이 엉켜진 시장으로 향한다.

새벽기도를 생략한 치열한 그들의 터전에서

값을 흥정하며 사온 1킬로그램의 슬픔.

바게트에 슬픔과 마늘치즈를 발라 오븐에 넣으면

슬픈 마늘 빵.

고독이 가루가 되어버린 까만 커피한잔을 곁들이면

근사한 아침이 되지.

 

점심은 그냥 건너뛸까 하다

김치볶음밥을 해먹기로 했어.

시어버린 김치를 총총 썰어

올리브기름에 볶다가

이틀 동안 냉장고에서 굳어진 밥을 넣고

계란 하나를 톡 깨서 넣고는 눈물 한방울로 간을 했어.

슬프긴 해도 영양가는 풍부하겠지.

 

저녁은 아무래도 신경을 써야겠어.

오랜만에 낭만이 찾아온다는군.

할머니의 은촛대에 기다란 빨간 초를 꽂고

송아지 고기를 포도주에 재워 구운 뒤

구석에서 슬퍼하는 버섯을 뽑아 소스를 만들어 뿌렸어.

사치를 한번 부려본 거지.

 

이 밤이 더 깊어지면 우리는

사랑을 할까.

아직 절반의 슬픔이 남아 있는데

 

 


 

홍숙영 시인

이화여대 졸업. 프랑스 파리2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박사. 2002년 『현대시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픈 기차를 타라』와 그밖의 저서로는  『창의력이 배불린 코끼리』, 『스토리텔링 인간을 디자인하다』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창의적인 글쓰기 프로젝트』 등이 있음. 현재 한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