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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시인(홍천) / 집 전화
휴일 밤늦게 울리는 벨소리 “승진아, 잘 있니~” 반가움에 떨리며 부르던 목소리 태평양 건너오느라 쉰 듯 이어지던 미국 사는 이모님 어눌한 액센트
수화기 놓는 게 아쉬워 끝없이 이어지던 똑같은 안부 “전화 안 오면 죽은 줄 알아라” 이제 더 이상 올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철거하지 못하고 놓아둔 집 전화
“내가 많이 사랑한다” “식구들한테 사랑 듬뿍 주거라” 귓전에 생생한 그때 그 목소리 이따금 벨 울려 훌쩍 받아보면 물건 사라 보험 들라 생경한 목소리
전쟁으로 어이어이 낯선 곳 내린 뿌리 “사람 사는 곳은 어데나 똑같아” 한 시간씩 얘기해도 끊을 땐 늘 힘들더니 이 세상 인연을 어찌 놓고 가셨는지 집 전화 볼 때마다 떠오르는 흰 머리 “이모님 거기서두 잘 계시지요?”
장승진 시인(홍천) / 낙산사여
새들이 피할 사이도 없이 불꽃들은 빠르게 왔다 민첩한 혀로 물오르는 참나무 새순을 핥고 거대한 소나무 숲 성벽을 넘어 마침내 오래된 서까래 푸른 단청을 삼켰다
휘발유를 한 모금씩 물고 있던 솔잎들 일제히 폭죽을 터뜨리자 대웅전 대들보가 금세 벌개졌고 묵묵히 걸려있던 동종에선 파란 연기가 올랐다.
해수관음보살이 열기에 바닥돌 터지는 걸 빙긋이 바라보고 동해 용왕도 바람을 보내 축하해 주었다 불붙은 원통보전 아름드리 기둥이 넘어지며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서기 이천오백 사월 오일 식목일 목마른 사람들이 TV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너는 그렇게 세상의 불꽃들 모아 아낌없이 자신을 태웠다
장승진 시인(홍천) / 코가 땅에 닿게
코로 숨쉬기 힘들 땐 배로 숨 쉬어야 한다 했다 섣불리 믿지 못했던 말을 해발 5천 미터 산에서 몸으로 확증했다
콧대를 높게 세운 일 있었던가 버킷리스트는 내 등을 떠밀어 킬리만자로 우훌루봉을 오르게 했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가야 하는지 계속 따라오는 코맹맹이 질문에 시달렸다
싱그런 초록 그늘 지나면 사막이 기다리고 춥고 숨가쁜 암벽이 나타난다는 걸 맵게 가르치려 한 것일까 난 코가 땅에 닿게 숙이고 기어가듯 기어가듯 오르며 깨달았다
코는 얼굴의 가장 높은 정상이지만 정상은 땅에 닿기 위한 몸부림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장승진 시인(홍천) / 동강할미꽃
이 꼴 저 꼴 다 보고 물굽이 내려다보이는 양지쪽에 주저앉았다
이 것 저 것 다 해보고 입 대신 귀부터 뼝대 끝에 활짝 열어제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다 돌아 심장에 걸린 것 모다 쏟아놓고 머리 풀었다
장승진 시인(홍천) / 미세플라스틱 커피 한 잔
점심 먹고 총총 받아들고 들어가는 테이크아웃 종이컵 커피
매일 한 잔씩 즐기던 시간이 세포를 죽이는 신경독성물질 되고 혈관 따라 몸 전체로 뇌 속까지 흘러다니고 있다니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돌고 돌아 내 몸속 축적되어 칼날이 되었다
편리함에 올라타 놀다보니 종이컵 하나에서 20개씩 나왔다는 5mm 미만 플라스틱 조각들 연간 7300여 개 미세플라스틱으로 쌓여 숭고한 정신의 우리 존재가 독한 쓰레기 저장소 되었다
장승진 시인(홍천) / 봄비 속에서
간절한 눈길로 그대 바라보는 한 사람 있다면 힘껏 살아야 한다
풀꽃에게라도 눈길 정성 주며 살아봐야 한다
젖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저 초롱한 잎사귀들 보아라 살아보려고 모질게 들어올리는 저 순결한 모가지들을 보아라
장승진 시인(홍천) / 양구 땅에 피는 꽃은
산 첩첩 물 겹겹 양구 땅에 피는 꽃은 피보다 더 붉어 산비탈엔 사시사철 꽃새가 우네
1951년 6월부터 12월말까지 도솔산, 대우산, 백석산, 가칠봉 피의 능선에서 단장의 능선에서 펀치볼 분지에서 이름 모를 고지에서 죽거나 실종된 군인들만 28,300여명
참혹했던 전투의 함성과 아우성이 넘쳐흐르던 피의 강이 지금도 바람 속에 흙 속에 묻혀 사정없이 꽃대를 밀어 올리네
지옥같던 포성 속 어머니 어머니 My Heart Breaks, Heart Breaks! 간절한 절규도 전설이 되고 아군도, 적군도, 유엔의 깃발 아래 바다를 건너 온 푸른 눈의 군인들도 하늘에 올라 비로 바람으로 때론 폭설로 그 날의 치열함 전할뿐이네
수호신들의 땅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예사로 보진 말게 그리고 잊지 말게 오늘의 자유엔 피가 묻어있음을 평화의 미소 뒤엔 숭고한 희생의 눈물이 있었음을
신화가 태어난 땅 양구를 지날 때 피보다 더 붉은 꽃을 보거든 영혼이 피었다 생각하게나 바쁜 걸음 멈추고 잠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해주게나.
-시집 <환한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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