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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시인 / 신상 중독증
오래된 마트에도 신상품은 진열됩니다
지목하지 않았지만 쉽게 결정하게 만드는 충동구매는 일상의 오답지와 같았죠 어떤 질문은 골목 여기저기서 소문이 되듯 즉흥적으로 건너뛴 선택도 가능합니다
누구나 마트에서는 이성을 잃는 용기가 솟는가 봐요 익숙하지 않은 생각의 내부로 진열장은 한 칸씩 늘어나고 유효기간 내에 간택되려고 상품들은 저마다 목숨 걸어요 가장 사소한 비밀은 신중에 신중을 더할수록 이 게임에 빠져들고 머릿속은 아이러니만 차곡차곡 쌓여요
신상품은 철저하게 나를 파악하고 있다는 듯 내 충동을 향해 힘차게 달려옵니다 쟁취할 수 없는 것을 기회라 한다면 나는 익숙한 것과 낮선 것을 연결하는 숙주 굳이 오류를 지적하자면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다 외우지 못하고 익명으로 부르고 말았다는 것
수많은 물건 속에서 보호색을 띠는 것은 나의 감정이예요 SNS에 길들여진 내 사고보다 진화된 골목 마트에 경배합니다 자꾸 그쪽으로 발이 멈칫대는 것은 고스란히 진열할 내 고백이 아직도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골목 마트는 24시간 불이 켜진 성좌에요
-시집 <반대편으로 창문 열기> 중에서
조선의 시인 / 쓸쓸함의 불치
낙엽을 바라보다 달빛을 밟고 말았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감정의 손익 분기점을 벗어나 먼 곳의 소리까지 붉어지는 기도의 방식
뒷전으로 밀려났던 체념이 악착같이 돌아와 그간 행불된 이파리마저 늦가을의 최전선으로 몰렸다
홀로이기에 쓸쓸한 것이 아니라, 쓸쓸함의 불치不治에 홀로된 것이다
진화된 생물의 서식지 같은 도시에서 왜 그토록 부질없는 일에 집착했는지 인정사정없이 시류에 떠밀리면서 움켜쥐려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바스락대던 단풍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무슨 비밀을 해몽하는지 귓전이 분주하다
서로 다른 여독으로 인해 나뭇잎은 붉고 노랗게 마지막 문장의 파국을 벗어나고 있다
-석정문학 36호
조선의 시인 / 아버지의 못
낡은 벽지를 뜯어내니 여기저기 못 자국이다 헐거워져 빠져나간 것들과 아직 그대로 박혀 있는 멈춤의 시간이 비장한 연대를 이루며 통점으로 남아 있다 벽에 귀를 대자, 쾅쾅 아버지의 망치 소리가 들린다
충격에 저항한 것은 몸이 뒤틀리고 힘의 방향으로 뚫고 들어간 것은 콘크리트 벽 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옆집에서 쾅쾅 못 박는 소리조차 은밀하고 신비한 내 슬픔을 관통하고 불모의 터 같은 벽에선 암각화 냄새가 났다 왠지 불안했던 휘어짐의 각도들이 장도리에 꿰어 나오고 예전에 피었던 꽃들은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누름꽃이 되었다
세월을 마중 나온 상형문자 같은 목숨
허름한 옷과 중절모가 수직의 힘에 의지한 채
어떤 소문도 발끝의 힘을 빼는 동안 아버지의 곧은 등뼈는 차츰 휘어 유통기한이라는 녹물에 꺾이곤 하였다
가끔 불꽃 같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반대방향으로 균형을 잃고 어머니 가슴에 대못이 박힐 때면 벽지에 난무하는 꽃잎의 시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마다 죽은 새를 날려 보냈다
못 서너 개 빼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바른다 모란꽃 발등 아래 구름의 얼굴 씻기는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연장통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못을 주춧돌에 반듯하게 펴 당신의 등고선에 어머니의 웃음을 걸어둘 추억을 못질하고 있다
조선의 시인 / 노을의 뼛속으로 어둠과 달이
산을 넘으려는 늙은 해를 바라본다
역광을 발산하며 서녘의 구멍을 뚫고 있는 열아홉 시
처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대추는 하늘에서 익는다
노을의 눈꺼풀 속으로 제 숨 풀어놓는 초저녁
도무지 저 인기척 없는 형물
하늘 바가지로 꽃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 생각으로만 하루를 넘기는 은밀한 화음花陰
막막이라는 그 수렁에 모든 세간을 수납한다
누구나 살면서 피눈물 몇 동이쯤 쏟아내지 않았겠는가만, 세상의 창문이 나로부터 열릴 때 일상의 물음이 멍 자국을 증언할 것이다
밤의 영혼 속으로 풀벌레 소리는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달은 밝기를 더하며 내 안을 통과하고 있다
조선의 시인 / 지칭개
지칭개, 하고 부르면 꼿꼿이 솟아오를 태세다 하늘 깊이 올라 빈 대궁 꽂고 붉음을 저수(貯水)한다
흔들림에 기댄 향촉 눈물샘 다독이며 하늘 우물로 꽃불은 타오르느니
상사(想思)든 마음 비워야 할 때가 있다면 그리움의 통증에 갇혀 집착의 끈을 놓는 날일 것이다
지칭개, 그 이름이 다정한 것은 서로의 상처에 다가갔다는 말일진대 궁(穹)속에서 끓는 핏물을 적셔 허공에 쓰는 글씨
마음을 비우라 밑도 끝도 없는, 우주의 기억처럼
조선의 시인 / 모란꽃 속에 갇힌 하늘
한낮의 고요에 갇혀버린 시간 스르르 봉오리들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언제고 놓아야 할 때 잡히지 않는 것부터 놓아야 할 때 멀리 가 닿지 못한 것들은 편애를 앓습니다
바윗덩어리처럼 생각은 굳어져 있는데 떠도는 소문에도 향기는 존재했을까요
불러보면 가깝게, 고독이 붉어지기까지 꽃봉오리는 비밀번호에 잠겼습니다 흐르는 구름의 방향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는 순간 살짝 웃어주는 것이 막연함을 좁히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방은 분화구 속처럼 조용하고 차마 고백하지 못한 말이 나를 슬프게 하지만 지독하게 오월의 소리 없는 소란이 눈부십니다
스스로 꽃 속에 빠져든 하늘 어디쯤에서 서로 허물없이 마주보는 표정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끝내 제자리를 떠날 수 없어 새들의 허공까지 모두 품고 멀리 사람이 떠난 길로 모란꽃이 피었습니다
봄 멀미 가득하게 생의 격랑 흘려보내면 웃자란 욕망이 귓바퀴를 흘러내리고 비워도 남아있는 몽환의 혀끝이 아립니다
불후의 침묵을 깨뜨리며 창백한 세월의 손목을 잡아주는 꽃 한때의 속삭임처럼 모란은 피었습니다 당신의 처음 눈짓이 그립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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