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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시인 / D-day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던 날, 엄마는 채식주의자*를 건네주셨다 학교 도서관의 도서 폐기 목록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다
엄마를 믿어도 될까?
사냥개의 다큐멘터리를 보던 날, 엄마는 토끼를 쫓는 사냥개를 보고 잔인하다 했다 엄마랑 돼지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중이었는데 사냥개와 나, 둘 중 누가 더 잔인한지 헷갈렸다
시험문제를 풀 때마다 답지는 반쯤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답지를 찾아 엄마의 꿈속에서 늘 헤매고 다녔다 꿈을 깨도 하루 종일 다리가 아팠는데 엄마는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언제까지 다리가 아파야 할까?
*한강 소설
백지 시인 / 로그아웃
당신을 접속한 지 오래되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놓았고 나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헤매고 있다
당신은 로봇입니까? 문턱을 넘으려면 횡단보도를 지나가시오
당신은 횡단보도 너머 돌아서 있고,
오래된 블록들은 삭제되어 지나갈 수 없다 다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페달을 밟을수록 타이어 바람이 자꾸 빠졌다 다음 버스가 오고 있고 번호판을 보려고 안경을 썼다
당신은 로봇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비밀번호를 누르시오
당신은 여전히 돌아서 있고,
비밀번호는 나무 밑에 숨겨두었는데 술래인형이 지키고 있었으므로 나는 출발선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죽는 게임인지 몰랐다 술래 눈이 빨개지기 전 뛰어든다 6912**-*******
나를 증명하는 데 오후를 다 썼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백지 시인 / 상자
새벽녘 자명종이 자지러지면 아이는 좀비처럼 벌떡 일어났다 머리맡에 빼놓았던 눈알을 더듬어 대충 끼워 넣고 삐걱대는 뼈마디를 좌우로 돌려 밤새 헐거워진 관절을 조였다
책상 위 식성에 맞지 않는 식단, 미적분물화생지언매화작* 하루 종일 씹어 삼켜도 소화되지 않았다 다시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검은 상자에 모조리 쓸어 담았다
상자를 등짐처럼 지고 매일 아침 사라진 아이는 자정에야 돌아오곤 했다 아이와 함께 굴러다니던 피아노 건반들은 입술을 꽉 다물었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야구화는 신발장 구석에 숨어버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가 씹다 뱉어놓은 것들을 밟으며 밤길을 나선다
미적분물화생지언매화작 거리마다 상자를 짊어진 아이들이 더 큰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날 닮은 아이가 목을 꺽어 나를 쳐다 본다 눈에 핏발이 돋은 채
*고등학생 교과목의 줄임말
백지 시인 / 여름 울음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 붙어 운다 말복 지나고 처서 지나고 한차례 소나기 지나간 오후
목청껏 울면 죽은 엄마가 돌아올 것만 같아서 나도 저렇게 운 적이 있다 언니는 신던 스타킹을 내 입속에 쑤셔 넣었고 그럴수록 나는 더 악다구니를 쓰며 울었다
매미도 알았을까 울음도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는 걸
매미 소리 잦아들면
나도 꺽꺽 울다가 잠이 들었다 언니에게서 엄마 젖 냄새가 났다
자고 나니 방충망에 매달려 울던 매미는 없고 시든 울음만 허물처럼 붙어 말라가는 오후
여름에도 발목이 시리다는 엄마가 절룩절룩 울음을 끌고 가고 있다
백지 시인 / 전복
도마 위를 달리다 전복된 남자
도마 위에서 진줏빛 갑옷이 벗겨진 남자 도마 위에서 구릿빛 온몸이 토막 난 남자 도마 위에서 황금빛 내장이 터져버린 남자 도마 위에서 꽉 다문 입술이 찢긴 남자 도마 위에서 싸구려 술 한 잔으로 상처를 달래는 남자 도마 위에서 몸통 없는 다리로 집 한 채 짓는 남자
그 남자를 생각하며 전복을 요리하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바다향 껍질을 문지르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쫀득한 살점을 바느질하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비린 내장을 주무르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찢긴 입술을 핥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상처난 시간을 어루만지는 여자 그 남자 위에서 노 젓다 조용히 전복되는 여자
배고픈 고래처럼 여자를 삼켜버린 남자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도마 위를 걷는 남자
백지 시인 / 우리 집에 왜 왔니?
길고양이 한 마리 계속 나를 본다 긴 꼬리 치켜세우고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오지 않을 미래같이 신비한 눈빛으로
미래라 부르면 좋겠어, 오늘부터 넌 미래
유리문 사이에 두고 경계의 눈빛만큼 떨어져 서로를 읽는다
미래를 얻는 법 섣불리 다가가지 않기 함부로 손 내밀지 않기
미래가 계속 나를 본다 긴 꼬리 부풀려 바닥을 탁탁 치며 죽은 자의 손길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미래는 한번도 내게 오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미래를 불러올 수 있다면
너는 시인의 눈을, 나는 미래의 눈을 사이좋게 나눠가지고
우리는 오드아이로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나눠가질 궁리를 하며 유령처럼 마주 앉아 서로 주고받을 거야
-꽃 찾으러 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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