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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옥근 시인​ / 수유역에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3.
장옥근 시인? / 수유역에서

장옥근 시인​ / 수유역에서

 

 

서정춘 시인이 사십 년 걸쳐 썼다는 종소리가

지하 수유역에도 가루가루 우는데

수유역4-4구역 의자에

부러진 삭정이처럼 노인이 누워 있다 마디마디 풀려서

팔과 다리가 축 처지고 눈을 닫아 버렸다

더 가야 하는데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철들지 않을 때부터 달려왔는데,

수유3동 콩나물 놀이터 옆 에미 없는 일곱 살 다섯 살

손주들이 있는 청안빌라 내 집까지 가야만 하는데

짧은 겨울해가 붉게 멈칫거리는 북한산에

검은 까마귀 한 마리 길게 날아간다

단단해져야 할 세월을 한 귀퉁이도 무심으로 넘지 못했으니

가느다란 바지 끝에 찬바람이 스칠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내 삶 한 켠에 자라나는 올망졸망 다섯

내 새끼들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얼마나 손마디 굵은 시간들을 보냈던가

예기치 않는 곳에서 불쑥 삶의 끝자락을

마주한 그가 지금

어느 날 지하철 창문에 스치듯 비치던

제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눈을 감은,벙그러진 입속으로

어머니의 붉은 젖꼭지가 들어온다

 

―시집 『눈많은 그늘나비처럼』 (문학들, 2017)

 


 

장옥근 시인​ / 귀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지나온 길을 다시 가는 것은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앞으로 길은 늘 열려있었기에

쉽게 갈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나무는 늘 제자리에서

바람을 들이고

검은 흙은 제 자리에서

나무들을 키우고

나는 내 자리에서

무엇을 했나

떠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돌아오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붉은 이파리 한 장

그 그늘 속으로 기어드는

저녁에

빈손이 시리다

 

 


 

 

장옥근 시인​ / 해파랑 길을 걷다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

바닷가 소나무들은

사철 귀가 시퍼렇다

살아보자

살아보자

기슭을 핥는 차가운 혓바닥에

파도는 늘 혓바늘이 돋고

이기대 해파랑 길을 걸으면서

내 몸도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다

 

무슨 말을 하는지

농바위 앞에서

검은 가마우지 몇 마리

지는 해에 숨을 고르고

나도 잠시 숨을 고르고

 

물길처럼 쉽게 닫혀버린

그 사람과 나를 생각한다

생각이 다르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보는 것이 다르다

듣는 것이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다르다

파도는 쉬지않고

나를 핥고

내 귀도 시퍼래진다

 

 


 

 

장옥근 시인​ / 어떤 슬픔

 

 

압력 밥솥에 들어가는

얼굴 없는 오리가

가끔 슬퍼 보일 때가 있다

속은 비었고 날개 죽지도 없고 발목도 잘린

오리 몸뚱이가

왜 젖어 보일까

온 몸으로 퍼져있는 마지막 눈물이

죽어서도 마르지 않은 것일까

살아있던 어제는

마지막 뼈 한쪽 맨 살덩이에

날기를 포기한 날개에

물기로 남아 있는 것일까

육신공양을 준비하는 오리

얼굴이 보일 때가 있다

 

 


 

 

장옥근 시인​ / 사발 어머니 밥그릇

 

 

오래된 모든 것들이 추억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네

몇 년째 사람의 손길 가지 않은 어머니 장독대

숨죽인 세월처럼 하얗게 나앉은 사발 하나

빗물도 고이고 이슬도 고이고 달빛도 고여서

푸른 이끼가 듬성듬성 한 시절 금 간 아픔을 덮고 있네

손 귀한 종갓집에 첫 딸을 낳고

허연 사발 가득 멀건 미역국에 보리밥 몇 알 담겼던 기억만 남아 있는

걷어 내도 걷어 내도 차오르는 섬진강 가을 안개처럼

가파른 용두 베틀 재 고개처럼

씹히지도 넘어가지도 않던 설움과 낯설음과 가난

사랑받는 막내딸로만 곱게 보낸 스무 해를 묻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던 신랑과

4대가 함께 사는 층층시하 종갓집 종부였던

아홉 골 모퉁이 바람처럼 시리기만 하던 어머니 한평생

잘린 버짐나무 옹이처럼 손마디 굵은 어머니

섬진강가 밭머리에 흘러간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또 흘러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끝 없는 세월을 지나 이미 가 버렸거나 잊혀져 버린

이 세상 가장 외진 곳에 깨진 사발 하나 있어

 

 


 

 

장옥근 시인​ / 잡초

 

 

풀 한 포기 뽑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름 부를 수 있는 풀들은

잡풀이 아니어서

망초 여뀌 쇠별꽃 뽀루뱅이 쇠비름

바래기풀 강아지풀 냉이 질경이 애기똥풀

부추밭에도 고추밭에도 상추밭에도

그것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내가 키우고 싶은

부추와 고추와 상추는

크지 못하고 죽어 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누군가보다 강해야 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내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일까

부추밭에서 부추는

고추밭에서 고추는

상추밭에서 상추는

자신의 자리를 다른 풀들에게

다 내주고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서로 기대고 어울리지 못했다

함께 살지 못했다

 

-시집 <눈많은 그늘나비처럼>에서

 

 


 

 

장옥근 시인​ / 우이동 겨울

 

 

산골의 밤은 길다

 

마음이 늙어버린 사내의 긴 한숨도

길다

 

주인도 눈도 소리도 잃어버린

유기견 봉순이도

까마귀 떼 울음소리도 잠들어

 

배고픈 멧돼지 일가만

거칠게 길을 더듬는

달 없는 밤

휘청거리는 계곡 물소리

산 밑 겨울은 별들만 총총하다

 

숨 가늘어지는 은행나무 빈가지

까치집도 조용하다

 

 


 

장옥근 시인

전남 구례에서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 2013년 《시와 경계》 등단. 시집 『눈 많은 그늘나비처럼 』 『가을 살청』.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