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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인 시인 / 둥근 물집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둥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불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 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주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린다 여섯 개 만 원이요 붉음이 노랗게 벗겨져 후회로 바뀌는 순간은 아주 크고 둥근 것이라서 나는 하루에 한 알이면 일주일은 먹겠네, 재빨리 지갑을 열었다 사내가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담는다 아랫배가 축 처진 봉지에 담긴 사과가 둥근 물집 같다 나도 터뜨리지 못한 물집 같은 저녁 -202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시
우정인 시인 / 신종 도감
보고되지 않은 종에 대해 쓴다 화석으로도 발견된 적 없기에 뼈의 길이와 섭생을 유추할 수 없다
그들은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서식한다 쿵쿵과 고요함 사이에 끼어 산다 쉽게 깨어지는 구름과 하루 사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꼬리뼈가 지워진 자리 망할, 불면증에도 그것은, 산다
여러 마리가 뒤엉켜 살기도 한다 발자국 화석이 보고된 적 없으나 유인원과 동종으로 유추된다 발 소리는 깊은 밤, 더욱 우렁차다 이 동물을 야행성이라 쓰기로 한다
짧고 간결하게 스타카토, 길고 지루한 난타, 의자 긁는 소리, 피아노 소리, 진공청소기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알 수 없는 고함소리, 낭묘와 여묘처럼 수상한 울음,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바람의 여백 침묵과 침묵 사이에 때때로 둔탁한 마침표를 남긴다
수많은 제보가 모여들지만 아무도 그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없다 인터폰이나 초인종 소리에 거칠고 포악해진다는 제보가 때때로 접수된다
그냥, 살고 있다고 쓴다 멸종 기대 동물, 이라고 쓴다 우리 집 위층에도 있다고 쓴다
-계간 『애지』 2025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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