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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나 시인 / 세상이 깨끗하다
여러분, 준비물을 꺼내봅시다 '개구리는 초식동물인가' '나는 초식동물인가' '어떤' 개구리는 매양 식물을 운반합니다 나지막이 기리며 다가가 풍기며 심심합니다 모여들었다가 물이 먼저 지나가도록 합니다 알싸하게 기어갑니다 벚잎을 먹나 봄이라서 여드름 짜고 한 방울 두 방울 응고 색출합니다 배출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퇴비됩니다 잠시 한가로운 한때를 보냅니다 아침이면 일어나 규칙적으로 씻었던 세상에 알림 alarm 흐르고 녹아서 흐르며 뛰어올라 줄줄 매일 배부르게 살고 있습니다
윤유나 시인 / 아름다운 피부과 살결 너머로 분명 첨벙거렸는데 나는 허우적거렸지 불을 켜뒀잖아 매미가 날아올 것이고
나의 개입이 어째서 자연의 섭리가 아닐 수 있어 어느 날의 행운과 변수를 담아
아주 어여쁘구나, 고스란히야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진화해 날아가렴, 너의 뜻대로
참 살가운 마음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자는 동안 나는 휴지로 뭉갠 날벌레의 다리를 자세히 보았다 맨 윗다리 한 짝을 길게 뻗은 것이 꼭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책을 읽어봐 심호흡을 크게 하던지
뒤척이는 이이 책에서 만나 내가 오래 때린 아이 치명상을 입었고 가끔 이렇게 옆에 와 눕는다
옆방 부부가 사랑을 나눈다
괜찮아? 괜찮아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피부 뿐이야 피부를 벗고 잘 순 없어
유리 접시에 진주알 굴러다니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다 계간 『시와산문』 2023년 겨울호 발표
윤유나 시인 / 피를 뒤집어쓰다
풀숲을 봅니다 갑자기 칼날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거리 섶나무 등등 지난 계절 등등 풀 마디를 봅니다 웃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다 타자기 두드리는 엄지손가락 아래로 검은 거미가 지나간다 그 회사에서 파는 싹쓸이잡초제거예초기를 본 적 있습니다 교회 오빠한테 문자가 왔다 ‘할아버지 산소 벌초하고 아버지랑 나란히 앉아 있어’ ‘응. 벌 없어?’ 교회 오빠가 학교 선배의 코 뼈를 부러뜨렸다 걷잡을 수 없이 우거져 있군 지나간 것들은 모두 목소리를 지녔군요 코피가 사랑이 무섭고 아름답고 가끔 젖어요 젖어요는 족보 있는 풀이예요 나무만 그런 게 아니고요? 조팝나무 같이요. 젖어요 젖어요 풀 베면 젖어요 여기 저기
눈 코 입,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짐승을 누가 데려다 놓은 게 아니라면 스스로 찾아들었거나 뭐, 말 못 하는 짐승의 ‘죽을 자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죠 바람, 몸을 배회하는 벌레와 사람들의 목소리 혹시라도 낳아놓은 새끼가 있다면 빛에 형체가 스미는 장면과 스치는 소리
부디 이곳에 안식이 깃들기를 속에서 눈 감아요
숨을 멈추고 잠시 영원
스치는 소리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내 자리 깎인 풀들로 뒤덮인 눈 코 입은 어디로 사라질까 얌전히 지내다 짖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는 저 사라진 얼굴이 내 자리
뿌리가 약한 것들은 뽑히기도 합니다 겁에 질렸고 땅은 부드럽죠 빽빽한 곳에서는 회전이 많아야 합니다 소원하다 잔디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베어 물다 백로 경에 자라난 풀들은 새로운 마디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겨울 지나 봄이 와도 자라지 못할 테죠
첫마디를 내뱉고 눈먼 잡목과 풀밭 그들이 하릴없이 새기는 면을 읽습니다
속에서 눈 뜨는 모임 -계간 『시와산문』 2023년 겨울호 발표
윤유나 시인 / 헤어진 순이
있었다 친구 없는 철수가 생각할 만한 생각이 없고 말하고 싸우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철수가
샀다고 입을 수 있는 티 팬티가 아닌 소리쳐 부르면 '여기 있잖아' 읊조리는 같이 놀고 싶은 사람, 시시한 사람 철수가 있었다 한 사람만 사랑해야 되는 철수가
검은 양말을 신고 검은 모자를 쓰고 아로마 향이 통증인 날엔 철수를 달랜다 은단도 마찬가지니까 하염없이 철수를 달랜다
하얀 사람 빼곡히 들어선 하얀 집 하얀 기쁨 부스러기 흩날리는 하얀 나비 철수
윤유나 시인 / 착한 눈 메우기
저 자는 나를 키우기에 너무 고단해 나쁘지 않았어 저 자는 나를 돌보기에 너무 병들었어 나쁘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고서 나는 아팠어 낚시를 떠났어
내 입버릇이 결국 나를 떨궜나
저 자는 늙는 것에 중독되었던 거야 나쁘지는 않았어 저 자가 원하는 걸 알고 있었어 나쁘지는 않았어
산이 어째서 파랄까 섬에서 낚아 올린 물고기는 모조리 반 토막이 나 있었어 어째서 아가리와 꼬리를 놓고 나는 매번 피리 같은 리본을 선택할까
백합밭을 지나 토끼밭을 지나 나비밭을 지나
눈이 내린다 길고 험한 눈이 오늘도 마땅한 하인을 찾을 수가 없었어 무릇 믿음이 바로 이 자를 결딴내고 말 것이기에
내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온 후부터 나는 몽땅 추위에 떨고 샐러드를 먹다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시집 <하얀 나비 철수>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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