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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경 시인 / 꿈을 수선하다
내 안에 비가 내리고, 나는 그 비에다 물을 주는 중이다 자기 전엔 사막을 걷지 말라는 말 잠덧은 모래알이라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서 잠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꿈은 올라갈 수 없는 나무라는 말 무른 무릎으론 엄두가 안 나서, 꿈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떨지 마, 추위도 부풀어 올랐다가 털썩 꺼지기도 해, 꿈을 둥지라고 불러볼까 머리맡이 환해지게 어떤 마을은 액자로 걸어 두었어 벽을 두드려도 모른 척해서, 오래된 약속들이 떠나버려서, 참, 그때 누가 꿈을 찍어두었더라 떫은맛이 계단 꼭대기에서 툭! 데구루루루, 작은 꿈들이 채 익기도 전에 깨져버렸다 잠들어있는 조각은 조심해야 해! 꿈의 소매를 꿰매고, 꿈의 밑단을 잇대어 다시 일구자고 했더니, 뜯어진 잠들이 달려와 꿈속을 꼭꼭 주무르기 시작했다 꿈을 수선하려고, 비는 며칠째 박음질 중이다 ㅡ 2023년 경북일보청송문학대전 수상작
윤희경 시인 / 대티고개 ―선애에게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고갯길에 소나무가 많았지 대티를 재첩이라고 불렀다 뒤축이 벗겨져도 쉴 틈이 없이, 재첩국 동이를 이고 넘어가는 아지매들 돌아보니 차오르던 상현달 아래였다
망초나 달개비로 살자 너 모르게 고개를 꺾던 열일곱 달리는 기차처럼 앞만 보고 가자던 나 모르게 가팔랐을 해운대 너머 달맞이 고개
등짝이 다 젖도록 달리던 에핑 로드를 재첩잡이 출항하는 똥통 다리로 알고 퇴근길에 졸며 졸며 돌아가던 카스힐 로드도 낙조가 아쉬웠던 몰운대 아래 숲길이라 하자
말만 들어도 숨이 넘어가는 고개를 건너 엎어 치고 둘러메치다 멍이 든 하지감자에 잉글리시 홍차 한 잔이면 어떤가
이제야 손발 짓이 통하는 똑딱선처럼 아이들이 기댈 둔덕이 되어 준 시드니 대티나 재첩을 네가 꿈엔들 짐작이나 할까
우리 모르게 아쉬운 듯 소나무로 어두운 꼭대기에 서서 내려설 곳 아프게 바라보았지 고개는 터널이 되고 터널은 글레노리나 괴정이 되어 떠남을 잊은 듯 서성이는 나무 그림자들 대티를 솔티라고 부를 수밖에
윤희경 시인 / 풀과 씨를 먹고 있는 소와 새
어기적거리는 큰 누렁이들과
주먹만 한 흰 새들이 호수 같은 풀밭에 철조망도 없이 띄엄띄엄 서서
조식 중이었다 소낙비는 저쪽에서 시커멓게 달려오는 중인데 비를 피해 두 칸 우사로 들어가겠지 넬슨 베이 로드에서 본 흠뻑 젖을 나라와 그 시민이
오는 내내 나란히 걱정되었다
윤희경 시인 / 빈 눈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그레브 여인을 봤어요 서두르는 등을 좇아 덕진면 엄마 집으로 나도 달려요 그녀의 등짝을 미는 짧은 겨울 그림자
하얀 소 케이트가 여인을 반기네요 불어서 뚝뚝 흐르는 젖은 외가의 쌀독만 해요 뜨물 빛 우유를 짜는 소란 속에 무쇠 주전자는 끓고 있어요
재속에 묻어둔 고구마가 탈 때쯤이면 검푸른 새가 잠투정해요 내 얼굴을 쓸어 재우던 외할머니 마른 손바닥, 케이티는 긴 혀로 제 아가를 샅샅이 핥아주지요
양배추로 만두를 싸 소스를 부어 찌는 살마와 돼지고기 소시지 췌슈노브케,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땅과 나무와 가축들이 먼저 끄덕여요 십 년째 무시로 고향 걱정, 이제 그만해요 엄마도
병상의 늙은 여인들은 언제부터 집의 옹벽이 되었을까요
눈발이 흩날리는 개울가, 자그레브 여인의 곡물 빻는 소리가 엄마의 적막한 겨울밤을 두드립니다 빈 눈 하나, 먼 그 집까지 어스름하게 비춰요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천년의 시작
윤희경 시인 / 호주, 부시파이어
미친까마귀들이 초여름부터 날아다녔다 부랴부랴 그 날의 다이어리를 들춰보지 않아도 폭양으로 달군 핏줄 선 눈동자
백만 홍위병도 아니면서 어리고 새파란 것들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걷잡을 수 없는 세찬 숨소리 정월에 시위를 떠나 섣달에 도착한 긴 화살 탁! 하고 정수리에 꽂혀 금이 쭉쭉 간 오세아니아 겁나게 쏟아지는 골수며 뇌간이며 전두엽의 해체 ㅡ누가 제발 이 화살을 뽑아주세요 ㅡ단 하루 분 소나기라도 화마가 휩쓴 수백의 마을 거금을 삼키고 뒤도 안보고 달아나버린 빚쟁이들 우리는 몽땅 털렸다 하버브릿지 그믐 불꽃놀이는 싹 접기로 했다
윤희경 시인 / 푸른 돌
가장 멀리 던진 돌이 가장 많이 앓던 돌이라고
돌 하나 주워 무심하게 돌 수제비 던진 순간 물속에 떨어져 갈 바를 모르는 동사들
당신이 나를 던지면 어디로 날아갈까 어디에 줄을 서 청구서를 쓸까 가라앉기나 할까 보낼 길이 없어 망설이던
물기둥 마디마디에 구불구불 모여 새우잠 자는 바닥없는 집에서 잠들어야 했던 가난한 우리 사랑
제가 던진 돌을 밟고 건너온 유목의 바다 날아간 돌마다 곪아가는 사연이 있다
가장 앞줄에 선 푸른 상처 다신 안볼 것처럼 가장 멀리 던졌던 바로 그 돌이었다
윤희경 시인 / 구녁
뻐꾸기 울음소리 초여름 밤이 깊었다. 무심코 여는 문소리에 날아가 다시 앉는다. 멀어진 구슬픔에 귀를 더 길게 열어보는.
멀리서라도 실컷 울어라. 어미는 이국의 사생아였으니, 구석자리 거미줄이며 먹을 것을 갈취해서 움켜쥐는 악다구니, 산 입 지키려고 눈에 불을 켜는.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말을 못 믿던 초년 댁이, 탁란도 아닌데 깨뜨린 하얀 알, 지갑속이 빌 때마다 그 탓을 했다
시티 센트럴 역 근처, 이름도 기억 못 한 병원, 뻣뻣한 다리를 어떻게 벌렸을까, 사는 게 뭐 그리 무섭다고 그 여린 뱃속을.
참나리 꽃 피는 밤이니 자주 왔으면, 어린것 눈 좀 붙이고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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