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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일규 시인 / 핑계의 핑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3.
강일규 시인 / 핑계의 핑계

강일규 시인 / 핑계의 핑계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만 보았지

 

 이팝꽃 보고 나는 조팝꽃이라 했고 너는 아카시아향이 난다고 했어 바람 쐬러 가자는 말에 바닷바람 맞으러 섬으로 간다 했지

 

 섬은 네 안에 있었어

 그 안에 너를 쌓아 올리는 일만으로도 벅찼을 거야

 

 소문을 들은 적 있어

 

 버려서

 버려져서 가볍다는 건 핑계였겠지

 쓸모없는 핑계를 댈수록 핑계가 편해지는 걸 알아

 

 더 뺄 것도

 더 넣을 것도 없는 우리는

 

 아카시아꽃으로 노랫말을 쓰면 조팝꽃으로 후렴을 붙여주는

 그래서 모든 꽃이 하얬지

 

-시집 《그땐 내가 먼저 말할게》, 2022. 11월. 상상인

 


 

강일규 시인 / 시클라멘

 

 

 베란다에서 시클라멘을 키우는 것은

 

 겨울 햇살로 꽃의 무늬를 수놓는 일이라 했다

 

 시클라멘은 햇살의 온기로 꽃 하나가 피고 지면 또 다른 꽃대가 올라온다 했다 꽃이 피지 않으면 여름이라 했다

 

 나는 물로 키우고

 

 당신은 입김으로 키우고

 

 물을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요! 라는 핀잔에 가끔은 물을 빼 버리기도 했다

 

 들어올 땐 싱그럽고 빠질 땐 뜨끈한 바람이 문틈을 들랑거렸다 그 바람이 꽃을 피운다 했다 그녀처럼

 

 화분에 젖꼭지만 한 붉은 꽃망울이 맺혔다

 

 한겨울에 이토록 화사한 꽃을 피웠으니,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향기를 맡으며

 

 고개를 빳빳이 세운 저 시클라멘도

 

 꽃이 필 때는 아플 거라 했다

 

 


 

 

강일규 시인 / 한 켤레의 구두

 신발장 맨 위 칸

 낡은 구두 한 켤레 있다

 오랫동안 발을 맞춰본 적 없어 주인의 첫걸음이 왼발인지 오른발인지 자신의 색이 회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른다

 시멘트 냄새와 뒷굽의 바깥이 심하게 닳은 모양으로 주인의 직업과 팔자걸음을 짐작케 한다

 공사장을 오가며 복용하던 약 기운이 떨어질수록 그의 얼굴은 까매지고 걸음은 갈지자로 비틀거렸을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의 행적은

 어느 신발도 가늠할 수 없는 신의 영역

 그는 떠나기 전 신에 대한 예의로 검게 불광을 내고 풀린 끈을 잡아매고 납작한 코를 세워 신발장 맨 위 칸에

 가지런히 놓았을 것이다

 오늘 밤

 아버지 다녀가신다

​​

-시집 『 그땐 내가 먼저 말할게 』(상상인, 2022)

 

 


 

 

강일규 시인 / 양말

 

 

포스토이나 동굴*엔 눈구멍이 막힌 휴먼피쉬가 살고 있다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더는 진화를 멈춘 원시 생명체

 

구두 속에서 더디게 진화해 온 양말이 발의 형틀에 맞춰

제 몸을 팽팽하게 성형하였다

하나가 둘로 갈라져 구두의 행적을 염탐하면서

구두의 좌우를 넘나들며 발의 치부를 감싸주었다

 

양말은 어둠에 익숙해지자 두 짝이 경쟁하듯 퇴화하고 있다

발의 네일아트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무명 속에 설핏설핏 박혀 있는 나일론 심줄을 뽑았다

 

둘둘 말린 몸으로 방구석에서 서로의 입을 맞추며 발의 냄새인지

구두의 냄새인지 핥고 있다

한쪽의 몸에 눈구멍이라도 내고서야 긴 행보를 멈추리라

 

*슬로베니아 서부 도시에 있는 동굴

『미래시학』2018년 봄호

 

 


 

 

강일규 시인 / 불빛의 경계

 

 

태초에 사람들은 그를 발견하고 꽃이라 불렀다지

저마다의 화덕을 달구고, 깊은 밤을 밝혀주는

 

화덕의 경계를 넘은 그, 더는 꽃이 아니었지

숲의 영역에서 바람에 널름대거나 스스로 생동하는 힘줄을 허물고 삼키는

 

바람의 등에 올라 바위의 속살을 뒤집다가도

경박하게 나풀거리는 나무의 머리를 자를 때는 빛의 속도로 내달렸지

뭉게구름이 무거워질 때까지

천둥벼락이 내리칠 때까지

 

바람에 찔리고 그을음에 긁힐수록 점점 비대해진 몸

되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 위에서 하얗게 죽었다지

 

불의 박물관에서 뛰쳐나와 LED 유리관 속으로 뛰어든 형형색색의 빛

씨가 없으므로 차마, 꽃이라 부르지 못했다

 

-『미래시학』 2017년

 

 


 

 

강일규 시인 / 토하

 

 

 동네 저수지에서

 방생으로 추정되는 동남아산 등검은새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겨울

 저수지 바닥에서

 

 수온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남아

 진화의 단계를 앞당겼다는 설이 파다하지만

 

 임금체불로 생활고를 겪던 건설 현장의 한 불법체류자가  

 창 없는 쪽방에서 허리가 휜 상태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찰은 닫힌 공간에서 폐소공포증으로 인한 돌연사라는 의사의 애매한 소견을 사망 원인으로 발표했고

 

 나는 단순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향수병에 의한 사망으로 단정 지었다

 

 누구에게도

 부고를 전할 수 없는

 저 허리 휜 신원 미상의 시신

 

 마침내 죽어서야 세상 밖으로 드러난 그의 붉은 살빛

 빛이 울기 시작한다

 

 


 

 

강일규 시인 / 불안불안 재계약

 

 

도서관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취준생 같아

 안 보이면 취직했나 싶은

 

 수시로 입사원서를 쓰는 너에게 첫 월급 탔다고 밥 한 번 먹자 했다가

 

 면접이나 보고 먹자며 미룬 것이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다가 마침내 입사한 너도

 

 계약직

 

 출퇴근용 출입증을 목에 걸고 현장사무소에서 늦은 시간까지 주간 공정계획서를 작성하다 알았다 일정과 공정 사이의 불공정 계약을

 

 사원증 걸고 휴게실이나 헬스장으로 내빼는 정규직 한 번 씹어보자고 나선 선술집

 

 뒷담화는 나쁜 상사라도 있고 욕할 회사라도 있어야 했다

 

 한 발 들여놓으면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재계약이 불안불안한

 우리는,

 

-시집 <그땐 내가 먼저 말할게>에서

 

 


 

강일규 시인

충북 영동 출생. 2017년 《문예바다》 신인상으로 등단. 2022년 《전남매일》 신춘문예 당선. 2022년 세종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그땐 내가 먼저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