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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호상 시인 / 민화투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3.
임호상 시인 / 민화투

임호상 시인 / 민화투

 

 

구순의 할머니 민화투를 좋아하신다

치매에 좋다고

가족들만 모이면 일부러 판 벌이는데

거짓말처럼 밤새도록 할머니 생기가 넘친다

 

얇은 패처럼 엎드려 있는 삶

매번 짝을 못찾는 패

자리가 안 좋다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이야기꽃, 웃음꽃 피우다보면

가끔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모은 것 펼쳐놓고

버려야 할 패와 셈해야 할 패를 악착같이 구분하는 할머니

때가 되면 가족들에게 가진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하실지 모른다

 


 

임호상 시인 / 야근

 

 

늦은 밤 어두운 침묵을 열고

작전 수행 중인 초병처럼

촉각 곤두세우며 들어선다

“왔어요”하는 암호도 오늘은 침묵

거실과 방 안에서 각자 잠복근무

오래되니 어둠도 옅어진다

한참을 기다리면 뒤척임마저 익숙한데 거실에 누운 두 여자

어느 쪽이 마누라고 어느 쪽이 딸인지

벌써 다 커버렸네, 내 딸

 

 


 

 

임호상 시인 / 미용실에서

 

 

세치가 여러 곳에서 자릴 잡았다

그녀는 염색, 나는 컷트

안팎으로 감추고 싶은 세월의 스크레치

바닥에 흩뿌려진다

가끔 디자이너의 눈 높이에 나를 끌어올리고

나는그녀의 생각에 맞춰져 간다

원하는 대로 내가 되어있을까

잘려나가고도 남은 미련들

스펀지로 털어낸다

수고하셨어요 디자이너의 경쾌한 목소리

착하게 변한 거울 속 남자가

미용실 밖 일상으로 따라나왔다

수고하셨어요, 당신도

 

 


 

 

임호상 시인 / 오동도

 

 

가시내, 쑥스러운가

 

가슴팍 몽우리로 엎드려

겨우내 있더니

이제사 동백꽃으로 피고 있네

 

붉은 그리움

툭, 툭, 피멍 지네

 

ㅡ시화집『여수의 노래』(시인동네, 2016)

 

 


 

 

임호상 시인 / 커피메이커

 

에티오피아 에카체프인가

혹은 케냐인가 네가 온 그곳

온몸 으스러져도 속까지 진밤이거나

문드러져 속 타는 블랙이거나

끝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로

오르가즘 느끼다

이내 숨 고르며 완성되는 사랑

이 밤 느끼고 싶어

부드러운 아침 깨우고 싶어

애타게 부르는 검은 유혹의 눈물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임호상 시인 / 조금새끼로 운다

 

 

 중선 배 타고 나간 아버지는 한 달에 두 번 조금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초여드레, 스무이틀 간만의 차가 없는 조금이면 바다로 나갔던 아버지들 돌아오는 날, 조금이 되면 어머니 마음도 분주하다. 뜸을 들이는 무쇠솥처럼 이미 뜨거워져 있다. 바다에서 몇 바지게씩 고기를 져다 나르는 날이면 앞마당에 호야불 켠다. 당신의 마당 에도 불이 켜진다. 보름을 바다에 있다 보면 얼마나 뭍이 그리웠을까, 얼마나 밑이 그리웠을까. 어머니 마음도 만선이다. 뜨거워진 당신은 선착장 계선주에 이미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선착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도 그랬다. 조금이 돼야 뜨거워질 수 있었던 그때, 갯내음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조금 새끼

 

 서방 들어오는 날 속옷을 널어 방해하지 말라는 수줍은 경고가 마당에서 춤을 추다. 어머니의 빨래줄에 속옷과 함께 널린 고등어 세 마리, 누구 것인지 알 사람 다 안다. 호루라기 불면 들어오라 했는데 어머니의 호루라기는 한참이 지나도 들리지 않고 오도 가도 못한 조금새끼들은 정박한 배처럼 문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어머니는 보름을 기다려 하루를 살지만 조금새끼는 한 달에 두 번 문밖에서 하루를 산다. 바다에 나가 영영 돌 아오지 않는 아버지도 홀로 남는 어머니도 참 많았다. 아버지 한 분에 어머니 둘, 조금새끼 십 남매 그때는 다 그랬다. 한 그물 속에서 그렇게 섞여 살았다고 누이는 막걸리초에 지나온 세월을 버무린다.

 

 어쩌면 남편을 바다로 보내는 어머니는 모두 다 작은 각시 아닌가. 바다는 아버지를 데려다가 보름이 되어서야 돌려보내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청상과부 작은어머니가 아버지를 차지하고 어머니는 살을 대지도 못했다. 한 달에 이틀뿐인데 그 이틀도 어머니는 멍청이 세월로 살았다. 조금이 돼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의 바다에는 소리 내지 못하는 파도가 쳤다.

 

 남의 뱃속에서 낳은 새끼도 남편 핏줄이라고 내색 못해 큰어머니가 엄마가 되는 먹먹한 유년을 살았다. 두 분 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낡은 풍경처럼 서로를 인정해주며 그렇게 섞여 살았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구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며 조금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육자백이, 먼 바다를 향해 청솔개비 두드리던 그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막걸리초처럼 속으로 속으로 삭히며 핏줄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을 절여 아버지의 입맛을 달래는, 아버지의 하루를 훔치는 어머니의 막걸리초가 되었다.

 

 어머니의 바다는 속 깊은 먼 바다, 겉으로 파도가 쳐도 깊은 속을 다 알 수가 없다. 날이 새면 어김없이 바다로 가는 아버지를 묶어놓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샌다.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밤새 하현달로 떠 있는 밤, 이 번 조금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당신의 아랫목 오래도록 따뜻할 수 있을까. 평생 바다를 보고 살아온 아버지도 어머니도 40년 배를 탔다던 정씨 아저씨도 바다가 무섭다는 말에 술잔에서 파도가 쳤다.

 

 


 

 

임호상 시인 / 홍어

 

 

옆구리 살짝 들쳐봤을 뿐인데

 

 

달려든다

 

한 점 가득 풀리는

 

아버지,

 

참 진하게도 취하셨구나

 

 

 


 

 

임호상 시인 / 당신

 

 

19도 잎새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더니만

36.5도 당신

그 눈빛 한 잔에

확,

취하네

 

 


 

임호상 시인

1967년 전남 보성 출생. 2008년 ≪정신과 표현≫으로 등단. 시집 『조금새끼로 운다』 시화집 『여수의 노래』. 제27회 한려문학상 수상, 제44회 전남문학상 수상. 여수문인협회 지부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