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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분홍 시인 / 마리골드
누군가 무작위로 뿌려놓은 한 톤 잠을 뚫고 불면이 노랗게 핍니다 꽃잎마다 접혀 있는 밤은 수면을 덧칠해도 착색되지 않습니다
다기 안에 담긴 마른 꽃잎에서 뜨거웠던 여름이 우러납니다
최후의 목적지로 흩어졌던 이별이 노랗습니다 메아리는 정체되고 무지개는 쉽게 변절합니다만 황갈색 얼굴을 뒤집었더니 천둥과 빗소리가 접혀져 있는 노란 우산이 펼쳐집니다
루테인은 무너진 시야를 얼마나 파지(把持)할 수 있을까요 흐릿한 시력으로 사도신경을 필사하는데 빛을 먹어치우는 안개와의 반목이 깊어질수록 구불구불한 글자들이 벌레처럼 우굴거립니다
노을에도 향기가 있습니다 잔향을 오래 음미하고 싶을 때는 바삭하게 말린 노을을 재탕해도 무방합니다 찻잔에 우려질대로 우려진 풍경을 따릅니다
이슬의 씨실을 뽑아 계절을 짜내던 마리골드의 한 생을 꺾었는데 목이 아팠습니다
숙면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불면 오늘밤 혼자서도 잘 피어납니다
김분홍 시인 / 킹스베리, 킹스베리
이 빌라는 노골적이에요 붉은 살을 드러내놓고 온몸으로 상대를 유혹합니다
지붕엔 검은 새똥 가득 쌓이고 유리창엔 수서역 기차 소리 익어갑니다 강남역세권은 아니지만 방은 공실이 없습니다
B02호 여자에겐 애인이 있습니다 어젯밤 애인과 나눈 밀애의 당도는 몇 브릭스일까요?
달콤한 밤은 전세 맛이었고 시큼한 밤은 월세 맛이었죠
아침이면 딸기 가는 소리가 들리고 애인의 입에서는 분쇄된 말들이 사방으로 비산합니다
하루는 갈린 대화에 뭉개지고 짓무른 감정을 졸여 잼을 만듭니다
딸기 한 동에 박힌 수십 개의 검정 씨앗이 배 속에서 발아하는 상상을 합니다
그녀가 애인을 자주 바꾸는 이유는 빌라를 바꾸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전세냐 월세냐의 차이일 뿐 기한이 차면 벽도 감정도 짓무르죠
빌라 호황에 균열이 생기면서 빌라M을 사랑한 빌라왕이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부동산 광풍에 매수한 빌라가 죄다 뭉개졌거든요 딸기가 빌라왕이라는 말은 치욕적이겠지만 사실이에요
한 철의 달콤한 뒤 욕망을 세척하지 못한 빌라가 지하층부터 짓물러갑니다
-계간 『시산맥』 2025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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