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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호 시인 / 수평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4.
최승호 시인 / 수평선

최승호 시인 / 수평선

 

 

땅을 베고 하늘 보던

미륵의 돌뺨이

발그스름해지는 황혼 무렵에

 

와불(臥佛)이 발을 뻗은 저쪽

긴 수평선은

잔광을 번쩍거리는 큰 칼처럼 누워 있을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 존재하는 것

수평선은 하나의 불사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한계 속에 살다 무한 속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한을 누리다 한계 속에 죽을 것이다

 

 


 

 

최승호 시인 / 네모를 향하여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 졸업.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 산문집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