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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한낮의 카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4.
이규리 시인 / 한낮의 카페

이규리 시인 / 한낮의 카페

 

 

카스텔라는 소리없이 먹을 수 있어

흘리지 않고 나를 보낼 수 있어

먹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사라질 수 있어

 

책을 두고

안경을 두고

네시를 두고

 

누가 옮겨놓은 게 아니라면

약한 부스러기처럼

의자에 미열은 조금 남을 거야

 

내가 사랑한 구석

그리고 창

 

이렇게 곧 아플까?

우리는

 

울까?

나를 붙잡던

사람은

 

 


 

 

이규리 시인 / 호퍼 씨의 밤

 

 

늦은 밤 주유소에서 셀프 주유를 할 때

 

이곳 참 드라이해요

 

선택하여 주십시오

 

주유구 속으로 딱딱한 팔을 구겨 넣을 때

 

오해도 아니고 이해도 아닌 스토리가 꿀렁꿀렁 흘러 들어가는 걸 봐요

 

당신 정말 멀리 있군요

 

주유하던 손이 손을 놓치고

외로운 시대야

종일 기계들만 마주하고 있어

 

어떤 한기가 아라비아의 수로를 따라

습격해 오기도 하는데

 

진심은 얼마나 채우겠습니까

또 비우겠습니까

 

누군가 잘못했다고 추궁해 온다면 잘못되고 말 것 같아

 

공손하게 셀프는 셀프가 아니야 옵서버야

 

밤의 주유소는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행선지는 멀어만 가네

 

다시 사랑이 오면

망치지 않을 텐데 무조건 잘 해줄 텐데

 

꿈이라도 긍정적으로 꾸도록 할까요

돌아오지 않으면 그게 용서니까요

 

주유구 안으로 밤이

검은 밤이

드라이하게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과 『뒷모습』, 『당신은 첫눈입니까』,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등과 산문집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가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