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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형 시인 / 옛날에 말이야
쥐꼬리 잘라 학교 가던 시절에 말이야 신문지에 누룽지 둘둘 말아 가지고 가던 그 옛날 옛적에 말이야 동무들 모여 돼지오줌보에 물 채워 축구하던 시절에 말이야 선생님은 똥오줌을 절대 싸지 않는다고 첨석같이 믿던 그 시절에 말이야 어느 일요일 오후 운동장에서 돼지오줌보를 냅다 차고 있었는데 말이야 갓 부임해 온 여선생이 일직 서다 말고 교무실로 나를 부르는데 말이야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손발 부들부들 떨며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말이야 일요일 한낮의 고요를 머금고 있던 괘종시계가 두 번 종 치는 바람에 뒤로 넘어갈 뻔했는데 말이야 선생님이 나를 무르팍에 앉혀놓고 준 미제 과자를 먹고 있는데 말이야 선생님 손이 신의 한 수처럼 반바지 속으로 스윽 들어오는데 말이야 내가 뒤로 넘어갔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모던포엠』 2025년 3월호
이돈형 시인 / 내게 강 같은 슬픔
손톱만 한 슬픔을 앉혀놓고 바르게 살자 타이르는데 해맑게 웃는다
떠들어봐야 제 입만 아플 거라는 듯 슬픔이 방바닥에 슬픔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고 빤히 올려다봐
웃어줄까 울어줄까
주위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은 없고 어쩌다 혼자라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처럼 제 몸에 무료만 칭칭 감고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업어 키운 슬픔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듯 눈 흘기는 저 능청에
나는 배알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어 슬픔 없는 곳을 찾다가
이 악물고 온 이 삶이 슬픔 없었으면 김 빠진 사이다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밍밍했을 것 같아
내게 강 같은 슬픔에게 손가락 걸며
오늘부터 일심동체!
-계간 《사이펀》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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