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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돈형 시인 / 옛날에 말이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6.
이돈형 시인 / 옛날에 말이야

이돈형 시인 / 옛날에 말이야

 

 

 쥐꼬리 잘라 학교 가던 시절에 말이야 신문지에 누룽지 둘둘 말아 가지고 가던 그 옛날 옛적에 말이야 동무들 모여 돼지오줌보에 물 채워 축구하던 시절에 말이야 선생님은 똥오줌을 절대 싸지 않는다고 첨석같이 믿던 그 시절에 말이야 어느 일요일 오후 운동장에서 돼지오줌보를 냅다 차고 있었는데 말이야 갓 부임해 온 여선생이 일직 서다 말고 교무실로 나를 부르는데 말이야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손발 부들부들 떨며 교무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말이야 일요일 한낮의 고요를 머금고 있던 괘종시계가 두 번 종 치는 바람에 뒤로 넘어갈 뻔했는데 말이야 선생님이 나를 무르팍에 앉혀놓고 준 미제 과자를 먹고 있는데 말이야 선생님 손이 신의 한 수처럼 반바지 속으로 스윽 들어오는데 말이야 내가 뒤로 넘어갔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모던포엠』 2025년 3월호

 

 


 

 

이돈형 시인 / 내게 강 같은 슬픔

 

 

 손톱만 한 슬픔을 앉혀놓고 바르게 살자 타이르는데 해맑게 웃는다

 

 떠들어봐야 제 입만 아플 거라는 듯 슬픔이 방바닥에 슬픔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고 빤히 올려다봐

 

 웃어줄까 울어줄까

 

 주위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은 없고 어쩌다 혼자라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처럼 제 몸에 무료만 칭칭 감고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업어 키운 슬픔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듯 눈 흘기는 저 능청에

 

 나는 배알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어 슬픔 없는 곳을 찾다가

 

 이 악물고 온 이 삶이 슬픔 없었으면 김 빠진 사이다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밍밍했을 것 같아

 

 내게 강 같은 슬픔에게 손가락 걸며

 

 오늘부터 일심동체!

 

-계간 《사이펀》 2024년 가을호

 

 


 

이돈형 시인

1968년 충남 보령 출생. 충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2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 2018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2019년 애지작품상 수상. 2022년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